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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홍도 ‘신광사 가는길’

기자명 손태호

원 세자 불공 드려 황제 등극한 설화 간직한 사찰

겨울에 접어든 산사 오르는 스님
김홍도 작품 특징인 ‘X’자형 구도 
‘석주집’ 실린 시 통해 장소 확인
해주에 위치해 가볼 수 없는 사찰

김홍도 作 ‘신광사 가는 길’, 종이에 수묵, 32.7×28.0cm, 조선 18세기, 안산 성호기념관.
김홍도 作 ‘신광사 가는 길’, 종이에 수묵, 32.7×28.0cm, 조선 18세기, 안산 성호기념관.

올 가을 안산 단원미술관에서 ‘단원아회(檀園雅會), 200년 만의 외출’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접하기 힘들었던 안산시 소장 진본 그림들이 공개되어 우리 옛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흔치않은 기회였기에 저도 서둘러 전시를 관람했습니다. 제가 가장 주목해서 본 작품은 김홍도의 ‘신광사 가는 길’로 작년에 옥션에 출품되어 잠깐 공개된 적이 있었지만 전시회로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기에 유독 관심있게 감상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겨울에 접어든 가을철 깊은 산속 계곡 건너편에 있는 산사 풍경과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스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김홍도가 좋아하는 ‘X’자형 구도로 노승이 오르는 길과 다리, 전각의 지붕, 그 위의 산비탈이 한축이고 좌측 상단 바위에서 우측 하단 바위로 이어지는 동일한 진한 농묵의 연결이 다른 한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스님은 지팡이를 들고 계곡 안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모자와 바랑도 없이 지팡이 하나만 든 것을 보니 아마도 잠시 외출하고 산사로 돌아오는 모양입니다. 스님 앞에는 누각형 다리가 있습니다. 누각형(회랑형) 다리는 석조다리와 목조다리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석조다리는 보통 홍예형으로 만드는데 순천 송광사 삼청교가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목조형은 돌다리 없이 누각 바닥이 다리 상판이 되는 형태로 곡성 태안사 능파각이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누각형 목조다리입니다. 그림에서는 돌다리가 없기에 누각형 나무다리이고 다리 중간에 종이 걸려 있어 종루의 역할도 겸했던 모양입니다. 만약 이 다리가 정말 신광사에 있었다면 당시 신광사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누각형 다리는 산문의 역할도 겸하는 경우가 많으니 저 다리를 넘으면 가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다리가 놓인 양쪽의 바위가 아주 진한 농묵으로 칠해져 있는데 스님의 발걸음을 따라 올라가면서 점점 먹이 짙어져 계곡의 깊이감 효과를 높이고 있습니다. 또한 계곡 안쪽은 다시 밝게 그려져 누각형 다리를 넘으면 산사가 아늑하고 포근한 공간임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산사 전각은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데 풍판은 없고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그리 크지 않은 전각일 것입니다. 지붕을 뾰족하게 처리한 점은 김홍도가 만년에 자주 표현했던 모습입니다. ‘조선고적도보’에는 신광사 오층석탑이 있는데 그림에는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중앙 빈 공간 제발은 안타깝게도 탈락이 심해 ‘秋…葉…水…落月…’등 몇 자(字)만이 보이고, 마지막에 백문방인으로 ‘김홍도인(金弘道印)'이 찍혀 있어 단원의 진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늦은 가을 깊은 계곡 고요한 산사의 풍경을 잘 담아낸 김홍도의 수작으로 원래는 ‘산사귀승도(山寺歸僧圖)’란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지워진 제발이 1631년 조선 선조 때 문인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의 대표 저서 ‘석주집(石洲集)’에 실린 ‘신광사(神光寺)’에 관한 시임이 밝혀져 이곳이 해주 신광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浮世功名已謬悠(부세공명이류유) 
林泉聊可慰窮愁(임천료가위궁수) 
秋風赤葉寒溪水(추풍적엽한계수) 
落月疎鐘古寺樓(낙월소종고사루) 
達士以閑爲好事(달사이한위호사) 
殘年唯懶是良籌(잔년유라시량주). 

‘덧없는 세상의 공명은 이미 부질없는 것이니, 임천에서 애오라지 곤궁한 시름을 달랠 만해라. 가을바람에 붉은 단풍잎은 찬 시냇물에 떨어지고, 지는 달빛에 성근 종소리는 옛 산사에서 들린다. 달사는 한가한 것을 좋은 일로 여기나니, 여생에는 오직 게으른 것이 좋은 계책일세.’ 권필의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서 소공(蘇公)이 부쳐준 시에 차운하다’.
김홍도는 권필의 시에서 3·4번째 구절을 적어 놓은 것으로 그림의 모습과 너무 딱 맞아 떨어지는 구절입니다. 신광사의 모습을 유추할 만한 시가 하나 더 있습니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 제1권 좌막록(佐幕錄)에 실린 신광사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宮殿麗巖腰(궁전려암요) 欹側週廊巧(의측주낭교). ‘산허리에 들어선 화려한 궁전 …중략… 비스듬히 세워진 주랑 공교하고….’ 여기에서 비스듬히 세워진 주랑은 바로 저 누각형 다리를 묘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해주 신광사는 ‘삼국유사’에 923년(태조6) 윤질(尹質)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가져와 절에 모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창건연대는 그 이전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고려 현종과 문종, 숙종이 행행(行幸)하면서 사격이 높아졌으나 어느 때인가 점차 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334년(충숙왕 복위 3년)에 원나라의 마지막 왕 순제(順帝)가 세자시절 서해 대청도에서 귀양살이 하던 중 해주의 북숭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무와 우거진 수풀 속에 한 부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만약 부처님의 도움을 얻어 환궁해 황제에 등극할 수만 있다면 마땅히 절을 지어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순제는 원나라로 돌아가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어느 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서 “어찌 서로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말을 남기니 순제는 예전 기억을 떠올려 거금과 원나라 공장(工匠) 37명을 동원하여 이 절을 중창하였는데, 그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동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고 전지(田地)가 250결, 거주하는 승려는 120명이나 되는 거찰이었습니다. 그러나 1677년 4월5일 큰 화재로 전각과 불상 등이 모두 불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복원을 하였다는 기록이 신광사에 대한 마지막 소식입니다.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린 18세기 후반까지는 사격을 유지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고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 신광사오층탑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만 남아 있습니다. 

그림 왼쪽에는 당대 최고 서화감식가인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선생의 글이 있습니다. 

“애석하다. 단원의 낙관이 이미 이지러졌고 쓴 시 또한 반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 솜씨가 매우 좋을 뿐 아니라 찍어둔 낙관이 완전하고 볼만해 보배로 갈무리 할 만하기에 매우 좋은 작품이다. 위창노인 제(惜 檀園落款 已缺 題詩半泐 然畵法 甚佳印文完好 殊可珍賞. 葦滄老人 題)” 

김홍도가 황해도 해주 신광사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해도 해주는 한강에서 배나 말을 타고도 이틀이면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곳이기에 말년 불자의 삶을 추구한 단원이 명찰인 신광사를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원 세자가 이곳에서 불공을 드려 황제로 등극했다는 이야기는 기울어진 가세로 아들 걱정이 대단했던 김홍도에게 더욱 가보고 싶은 사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해주 신광사의 모습. 이렇게 그림으로나마 이곳이 신광사였음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해주 신광사의 모습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광사가 얼마나 운치 있고 멋진 산사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거대한 사찰이라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는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주 찾고 아끼지 않으면 언제든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사찰 출입을 생활화하고, 사찰의 모든 것을 아끼고 가꾸어야 합니다. 

무심히 산사에 오르는 저 스님을 따라 이번 주말에는 아름다운 우리 산사로 길을 나서보면 어떨까요? 그 길에 분명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할 것입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17호 / 2019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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