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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에필로그(끝)

가장 과학적인 종교인 불교 기저에도 수학이 있다

과학기술 발달로 지적·물적 풍요
기복전통 힘 잃는 등 변화 필요
날란다대학 이성 전통 부활돼야
과학·물질 풍요로운 현대가 최적

법보신문 기자가 수년 전부터 필자에게 수학과 불교를 주제로 칼럼을 써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여러 차례 제안했다. 그때마다 필자는 수학과 불교는 별 연관성이 없을 거라고 거절했다. 어느 날 기자가 수학을 주제로 쓴 불교 논문 예닐곱 편을 보내왔다. 한동안 방치하다가 그 논문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생각, 즉 일종의 영감이 일어났다. 그래서 용감하게도 그 하찮은 그리고 적은 양의 영감을 바탕으로 칼럼을 쓰마고 약속하는 일을 저질렀다.

수학은 이성의 학문이다. 수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감성일지 모르나, 수학의 내용과 탐구·증명 방법은 이성이다. 필자는 천성이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렇다고 필자의 이성이 타인들보다 더 발달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강병균’이라는 생물학적 시스템 안에서는 그래도 이성이 감성보다 더 발달했다는 뜻일 뿐이다.)

인터넷·영화·드라마·책을 통해 접하는 감성적인 글과 콘텐츠들은 놀라운 수준이다. 얼마나 강력한지 그 앞에 서면 이성이 압도당해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다. 감성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소위 감성에 살고 감성에 죽는 수준이다. 가히 신의 경지이다. 이들은, 사람이 술이나 마약에만 취하는 게 아니라 감성에 취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감성이 없으면 기계이지 인간이 아니다. 감정이 가진 오묘한 맛과 대양과 대륙에 몰아치는 태풍처럼 격렬한 힘은 이성이 따라갈 수 없다. 우리를 들뜨게 하는 사랑이나 열정은  이성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과 열정이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35억년 진화의 역사에서 그 이름에 걸맞은 이성이 나타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아마 언어가 등장한 10만 년 전 정도일 것이다. 언어가 없으면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으며, 언어의 발달은 추상적인 사고의 발달과 일치한다. 그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도 있다. 언어는 기존의 존재에 대한 기술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대뇌 신피질이 엄청나게 커진 인간은 추상적인 세계, 즉 필자가 말하는 환망공상(幻妄空想)의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외계는 그냥 환망공상을 만드는 소재일 뿐이다. 학자들은 AI가 당분간 할 수 없는 일로 환망공상을 든다. 환망공상의 특징은 사실이 아닌, 즉 없는 생각 혹은 틀린 생각인데 AI는 이걸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마구 추측을 함으로써, 즉 환상·망상·공상·상상을 함으로써, 놀라운 발견을 해 낸다. 진리를 발견한다. AI는 이게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수학과 불교의 연관성에 대한 글은 분명 신심 차원의 글은 아니다. 연기법(緣起法)은 이해의 대상, 즉 이성의 대상이지 감성의 대상이 아니다. 이 점에서 수학이 불교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의식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존재의 밑바닥에는 수학적 바탕이 수학적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고 깔려있을지 모른다. 수학은 감성을 배제한 언어이기도 하다. 

인간의 과거 35억 년간의 정보(불교적으로는 업[業] 또는 알라야식)를 담고 있는 DNA의 구조는 수학적이다. 일종의 암호이다. 수학처럼 비(非)감성적 언어이다. 생물은 매번 그 암호를 해독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지난 35억년 동안이나 그리해왔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신을 믿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창조의 기저에 수학이 있다면, 가장 과학적인 종교인 불교의 기저에도 수학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세상은 지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풍요로워지고 있다. 이에 따라 기복의 전통이 힘을 잃고 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신을 믿는 풍토 속에서 꿋꿋이 이성의 전통을 거의 천 년간 이어간 날란다대학(AD 400년경~1200년경)의 전통이 현대에 다시 부활할 것을 기대한다. 이게 이 과학과 물질의 풍요의 시대에 불가능하다면, 가능할 시대가 없을 것이다. 이런 일에 필자가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수학자에게 매주 지면을 허락하는 보기에 따라서는 무모하게 보일 수 있는 시도를 하는 탐구심에 불타는 법보신문에, 그리고 매번 서너 줄씩 용량을 초과한 필자를 지난 1년간 너그러이 용납한 법보신문에 감사한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518 / 2019년 12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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