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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이상좌가 그려낸 인간적인 나한도

기자명 주수완

치열한 구도의 삶 살아가는 나한 고뇌 담긴 작품

노비에서 도화서  화원으로 발탁
드라마틱한 화법 강하게 드러내

스케치부터 뛰어난 필력 돋보여 
나한의 인간적 면모 표현 탁월

​​​​​​​문정왕후 불사 주도 화가로 추측
억불시대 불교 르네상스 이끌어

대표적인 이상좌 추정작품들. ‘송하보월도’(왼쪽, 국립중앙박물관)와 ‘불화첩’의 제15 나한도(오른쪽, 삼성리움미술관).

이상좌(李上佐)는 조선 초기인 중종대에 활동한 궁정화가로서 원래 노비였으나 그림 실력이 출중하여 중종의 배려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중종이 승하하자 이듬해인 1545년에는 중종의 어진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는 단순히 도화서에 발탁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실제로 이듬해인 1546년에는 공신들의 초상화집을 그려 왕실에 공헌한 인물들에게 수여하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실력이 출중하면 등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건강한 사회였던 것 같다.

특히 다른 일도 아니고 예술 분야에서의 실력을 인정받아 공직에 나가고, 공신까지 된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대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그림이 도대체 얼마나 뛰어났길래 이토록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을 뛰어넘어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상좌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가 중종의 특채에 의한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일반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일이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공신까지 받은 이상좌이니 그래도 그의 삶이 평탄했으리라 믿어 보기로 한다.

아쉽게도 실력 하나로 노비에서 공신의 지위에까지 오른 이상좌의 그림은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고, 그마저도 확실한 그의 진작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중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송하보월도’ ‘어가한면도’ 등이 그의 진작일 가능성이 높아 주목된다. 이들 그림들에 나타나는 특징은 중국 남송(南宋) 때의 궁정화가들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그림 스타일을 통칭하는 “마하파” 화풍을 보이고 있다. 이 화풍은 ‘몽유도원도’ 등 기존의 산수화에서 볼 수 있었던 유려하고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화풍들과 달리 의도적으로 산수풍경이 화면의 한쪽으로 쏠리게 구성하는 불균형적인 구도법, 나뭇가지들이 마치 꺾인 것처럼 각지게 뻗어나가는 다소 과격한 표현법, 그리고 인물을 거의 그리지 않거나 작게 그리던 것에서 벗어나 인물의 비중이 화면상에서 커지는 점, 먹을 사용함에 있어 콘트라스트를 강하게 부여하는 점 등을 특징으로 한다. 한마디로 그림 속에서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는 화풍이라 요약해볼 수 있겠다. 노비였던 그가 어디서 이런 화풍을 배우고 익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혹 그의 노비 시절 상전이었던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선비의 집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가 산수화를 그릴 때 이런 드라마틱한 필법을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중종의 어진이나, 공신들의 초상, 그리고 1543년에 예조에서 한나라 때의 서적인 ‘열녀전’을 간행할 때 그가 그렸다는 삽화 속 여성들의 모습은 매우 정교하고 우아한 필치로 그려졌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드라마틱한 산수화풍과 우아한 인물화풍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그가 그렸다고 전하는 ‘불화첩’ 속의 나한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리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현재는 다섯 점이 전하지만, 각 나한도에 쓰여있는 숫자를 보면 원래는 16나한을 그린 한 세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완성품이 아니라, 본격적인 작품을 위한 스케치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완성된 그림을 상상케 하는 뛰어난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현존하는 나한상으로는 남양주 흥국사의 목조16나한상(1650년경)이나 구미 대둔사의 소조16나한상(1703년)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사례인데, 이러한 상들의 모델이 이 ‘불화첩’ 속의 나한상들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닮은 점이 많다. 이들 이른 시기의 나한상들은 조선 후기의 다소 정형화되고 경직된, 그러나 해학적인 나한상에 비해 표정과 몸짓에서 사실성과 생동감이 넘친다. 
 

전 이상좌 ‘불화첩’의 제12 나한도와 구미 대둔사 응진전의 1703년작 소조나한상 중 1구.

또한 이상좌의 나한도에는 평온함이나 해탈의 경지라기보다는 치열한 구도의 삶을 살아가는 나한들의 진지함과 고뇌가 그대로 담겨있는 듯하다. 물론 웃음을 머금게 하는 조선 후기의 나한상들도 좋지만,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고민에 빠진 나한의 모습, 또는 저 멀리 간다라 조각의 걸작인 라호르 박물관 소장의 ‘고행상’처럼 인간적 고민의 면모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이 나한도 역시 엄숙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아마 노비의 삶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을 삶의 무게를 이상좌는 이 나한들을 통해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마치 기독교의 성인인 베드로를 위대하고 고상한 귀족의 풍모로 묘사하던 시대에 투박한 어부로서 본연의 모습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몇몇 선구적인 화가들처럼, 이상좌는 나한의 인간적 면모를 더 드러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겁고 진지한 소재를 날아가는 듯한 날렵한 필선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러한 고민과 번뇌가 곧 극복될 것임을 암시하는 듯 그려낸 것이야말로 이상좌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돋보이게 한다.

한편 중종 이후 어린 명종이 즉위했지만, 실권은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쥐고 있었다. 특히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고승 보우(普雨) 스님을 중용하고, 다양한 불화의 제작을 후원하였는데, 그중에는 오백나한도 세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한 점인 ‘제153 덕세위존자(德勢威尊者)’가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 전하고 있다. 중종 사후 공신에 올랐던 이상좌가 아마도 한창 몸값을 올리고 있었을 때로 생각되므로, 문정왕후가 불화를 발원할 때 그 불사를 주도한 화가, 혹은 화가들 중 한 명이 이상좌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있다. 실제 이 그림의 배경인 바위와 나무의 표현에서 ‘송하보월도’와의 유사성을 읽어볼 수 있다.

문정왕후의 불심, 보우 스님의 법력, 그리고 이를 펼쳐낼 이상좌의 예술성이라는 삼박자야말로 억불숭유라는 어두운 조선 전기에 잠시 불교 르네상스가 꽃 필 수 있었던 원천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문정왕후의 사후 보우 스님은 주살 당했고, 불교는 다시 암흑기에 들어섰다. 이때 이상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그가 장기인 불화를 더 그리지는 못하게 되었을지라도 산수화나 인물화에서 그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아남았었기를 바랄 뿐이다.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18 / 2019년 12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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