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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한국불교의 물길을 바꿀 상월선원 결사

기자명 법보
  • 기고
  • 입력 2020.01.02 11:00
  • 수정 2020.01.02 11:10
  • 호수 1520
  • 댓글 5

‘밖’이 아닌 ‘우리의 안’을 성찰하는 몸부림
시끄러운 소리를 벗 삼은 ‘동중정의 선(禪)’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겸 법보신문 논설위원이 최근 위례천막결사와 관련한 ‘한국불교의 물길을 바꿀 상월선원 결사’ 제하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 글은 봉은사보 '판전' 1월호에도 실렸다. 편집자

천막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문관(無門關) 결사 동안거에 아홉 분의 수행자가 입제한 지 한 달 반이 지났습니다. 상월(霜月)선원, 이름에서부터 느낌이 심상치 않습니다. ‘차가운 서릿발 내리는 달밤’, 어쩌다 한 번이라면 시 한 수 읊고 그 낭만적인 느낌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한 끼 식사에 목욕은 물론이고 세수조차 하지 않고 머리와 수염도 깎지 않으며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비닐하우스 천막 안에서 동안거 세 달 동안을 용맹정진에 들어가는 일은 결코 낭만이나 “우리도 한 번 해볼까? ……” 하는 초보 수행자들의 겁 없는 시도가 될 수 없습니다.

처음에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깜짝 놀라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또 쇼를 하는군. 저게 무슨 참선수행이야, 정치 행위지. ……”라며 비난해대는 이들도 꽤 여럿 있었습니다. 물론 신심 돈독하고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는 불자들은 아홉 수행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제발 무사하시기를! …” 간절히 기원할 뿐입니다.

“한국불교의 새 흐름을 만들어보겠다”는 아홉 분의 원력과 결연한 의지에 이런 기도와 격려가 더해져, 세 달 동안거의 반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우리나라 속담은, 세상 모든 일이 “한 번 해보자!” 마음먹고 첫걸음을 떼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상월선원 천막 안의 동안거 결사는 발원했던 대로 시작이 되었고 전체 여정의 반(半)을 지났으니 이제 정상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까지 순탄하게 가는 일만 남았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아홉 분의 수행자들께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격려를 보내고 함께 와서 철야정진을 하며 야단법석(野壇法席)을 펼쳐준 수많은 불자들에게도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보냅니다.

‘밖’으로 향한 요구·항의·찬성이 아닌 ‘우리의 안’을 성찰하는 몸부림

위례천막결사 대중들이 11월11일 입재법회를 열고 90일간의 용맹정진에 돌입했다.
위례천막결사 대중들이 11월11일 입재법회를 열고 90일간의 용맹정진에 돌입했다.

저 멀리 대승불교운동에서부터 시작해 고려 시대 권력과 밀착하여 부패한 불교계를 반성하고 혁신을 부르짖은 백련결사와 정혜결사를 거쳐, 가까이는 조선조 500년과 일제 강점기의 부끄러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불교를 바꾸어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며 시작한 봉암사결사에 이르기까지 2,700년 불교 역사에 등장한 결사는 모두 ‘불교 안’을 다시 살펴보고 문제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고치고 바꾸겠다는 원력과 의지가 모아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러면 안 되겠다. 부처님 정신으로 돌아가 진리를 깨치고 중생을 구원하는 올바른 불제자가 되자!”며 우리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자기 혁명의 운동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조선조 500년과 일제 강점기의 힘들었던 시기뿐 아니라 민족해방 뒤 맞이한 미군정과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시절에도 제도적·정치적으로 압박을 받으면서도 항의의 목소리 한 번 못 내고 지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제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힘은 봉암사 결사에서 ‘우리 안의 혁명’을 시도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둔 덕분일 것입니다.

1987년의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지방자치제 실시는 과거처럼 정권에 핍박당하고 끌려다니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표’를 구하는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졌고, 입으로 “불교를 위하겠다”는 말을 이어가면서 예산 지원 등등의 진통제(鎭痛劑)와 당의정(糖衣錠)을 계속 전해주며 달래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옛날처럼 속아 넘어가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정권이나 외부 권력이 우리의 자부심을 짓밟거나 권리를 침해하면 항의 시위를 펼치고 수십만 명이 모인 ‘불교도대회’를 열어 정권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였지만, 이런 움직임은 불교 본래의 모습과 거리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자칫하면 책임을 ‘밖’으로만 돌리는 어리석음에 멈추고 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상월선원 동안거 결사는 ‘불교 밖’에 대한 요구가 하나도 없이 오로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보자”는 원력과 수행의지를 다지는 ‘자기혁명(自己革命)’의 시도입니다. 부처님께서 왕궁의 편안한 생활과 세속 권력을 버리고 험난한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신 것도 이 ‘자기혁명’이었을 것입니다. 부처님 입멸 후 수백 년 만에 태동한 대승불교 운동과 중국에서 일어나 동아시아 각국에 긴 세월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선불교의 출발도 “우리가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변해야 한다”는 ‘자기혁명’이었습니다.

솔직히 우리 불교계는, 범위를 좁혀서 우리 조계종단은, 지난 세월 권력에 당한 핍박과 권리 침탈에서 연유한 콤플렉스 때문에 ‘모든 문제의 책임을 밖으로 돌리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어려움에 대처하느라,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며 세상을 구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饒益衆生)’을 구호로만 외쳤을 뿐 출·재가를 망라한 불자들이 체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상월선원 동안거 결제가 이런 불교의 흐름을 180도 바꾸는 ‘혁명’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니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상월선원 동안거에 들어간 수행자 아홉 분의 출발 동기는 같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크게 바뀌길 바라는 원력과 결연한 의지에서 마음을 낸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분위기에 끌려서 동참하게 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탓을 할 일이 아닙니다. 처음 마음 낼 적에는 서로 달랐지만, 동안거 결제가 이루어지고 이에 대한 사부대중의 응원과 격려 앞에서 모두 원력과 의지를 단단하게 다지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홉 분 수행자가 모두 ‘동안거 세 달’을 무사히 마친 뒤, ‘자기혁명’을 이룩하여 우리에게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혹 건강 문제 등으로 중간에 무문관을 깨고 나오는 분이 계시더라도 결코 탓을 하거나 실망할 일이 아닙니다. 세 달 동안 무문관 수행을 마친 분들에게는 물론이지만, 중간에 무문관을 깨고 나오는 분들에게는 또 그분들대로 환영과 찬탄·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려야 할 것입니다.

시끄러운 소리를 벗 삼은 ‘동중정(動中靜)의 선(禪)’

수행자 아홉 분이 천막선원에서 무문관 동안거에 들어가 계신 동안 상월선원 천막법당에서는 법회가 이어지고 때로는 음악회를 열기도 합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일부에서는 “참선은 고요한 산중에서 하는 것이지, 시끄럽게 장구와 북을 치며 소란스러운 곳에서 하는 게 무슨 수행이냐? 이건 정치 쇼에 불과하다”며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비판이 나올 만합니다. 지난 우리 역사가 그렇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통사람에게는 고요한 산중에서 하는 참선이라야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수행자라면 ‘시끄러운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히 앉아 있는 어묵동정 행주좌와(語默動靜行住坐臥)의 순간순간에 모두 참선수행에 몰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이르시는 과정을 담은 경전인 《장아함경》<유행경遊行經>(상좌부 팔리경전의 《디가니까야Digha Nikaya》 <대반열반경Mahaparinibbana Suttanta>에 해당)에 이런 부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한때 아월(阿越)마을에 갔다가 한 초막에 있었는데, 그때 기이한 구름이 갑자기 일더니 뇌성벽력이 쳐서 황소 네 마리와 농부인 형제 두 사람을 죽이자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당시 나는 초막에서 나와 천천히 경행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발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예배한 뒤 나를 따라 경행하므로, 그것을 내가 알고 ‘저 대중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라고 묻자, 그 사람이 곧 이렇게 물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아까 어디에 계셨습니까? 깨어 계셨습니까, 주무셨습니까?’ 내가 ‘여기 있었으며, 그때 자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이 ‘붓다와 같은 삼매를 얻었다는 말은 듣기 어렵습니다. 뇌성벽력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는데, 혼자 고요히 삼매에 드셔서, 깨어 계셨으면서도 듣지 못하셨다니요!…’라며 감탄하고 곧 내게 말했습니다. ‘아까 기이한 구름이 갑자기 일더니 뇌성벽력이 쳐서, 황소 네 마리와 농부인 형제 두 사람을 죽여서 저 대중들이 모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곧 법(法)의 기쁨을 얻고 나에게 예배한 뒤 떠났습니다.”

지금 상월선원 무문관에서 정진 중인 아홉 분 스님들이 처음부터 이런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마 아래 법당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는 물론이고 때로는 목탁소리, 그리고 응원·격려를 위해 선원 주위를 돌면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는 불자들의 목소리까지도 참선을 방해하는 악마로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스님들 각자의 근기에 따라, 어떤 분은 빨리 또 다른 분들은 다소 늦게 이와 같은 외부 경계에 끌려다니던 것을 멈추고 진짜 용맹정진에 몰입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아니 왔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부처님께서는 사람 둘과 황소 네 마리가 죽을 정도로 요란스럽게 천둥번개가 쳐대는데도 그 시끄럽고 요란한 외부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아월 마을의 초막 안에서 선정에 들어가셨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중들이 자연스레 존경과 예배를 드린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아홉 분 수행자들이 계신 위례 신도시 공사 현장 허허벌판에 터를 잡은 천막, 이 상월선원이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의 여정에서 머무시며 선정에 드셨던 ‘아월 마을 초막’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곧 법의 기쁨을 얻고” 수많은 이들이 삼보에 귀의하며 부처님 제자가 되었듯이, 상월선원 동안거 해제 뒤에도 이와 같은 멋진 장면이 펼쳐지기를 기원하고 기대합니다.

[1520호 / 2020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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