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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특집]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

  • 새해특집
  • 입력 2020.01.02 15:42
  • 수정 2020.01.02 16:12
  • 호수 1519
  • 댓글 1
올해 87세에 접어든 홍윤식 교수는 여전히 청년에 뒤지지 않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비록 그의 노구는 세월의 흐름을 따라가지만 문화를 바라보는 안목과 시대를 읽는 혜안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유·무형유산 아우른 불교문화 발굴·연구 ‘길 없는 길’ 열었다

범패 발굴·무형문화재로 등재시켜 불교 문화·학문 영역 무형유산으로 확장
문화재 인식 ‘성보’로 전환에 매진…성보보존위·불교미술공모전 탄생 주역
2019 조계종 불자대상 수상… 동국대 불교학술원 발전기금으로 상금 회향

소년의 꿈은 교육자였다. 1934년 경남 산청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집 앞 우뚝 솟은 황매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그리고 지금 소년은 유·무형을 망라한 불교문화재와 불교민속학에 이르기까지 불교문화 전반에 일가를 이룬 큰 산이 되었다. 동국대 명예교수 홍윤식(87)이다. 2000년 2월 동국대 교수로 정년퇴임한 홍 교수는 여전히 현역이다. 동국대 명예교수, 동방대학원대학 석좌교수로 위촉됐고 불교민속학회와 한국전통예술학회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여정은 학자의 길이자 개척자의 길이었다. 무엇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불교 무형문화유산을 재발견해 학문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은 학자로서 그가 이룩한 가장 큰 성과다. 1960년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범패를 발굴해 무형문화재 등재의 기반을 마련하고 유형문화재에 한정돼 있던 불교문화유산의 영역을 영산재, 수륙재 등 불교의례로 확장시켜 무형문화재의 영역으로 안착시켰다. 또 불상, 불화, 탑에 대한 인식을 단순한 문화재에서 예경해야 할 성보로 전환시키며 조계종에 성보보존위원회가 설립되는 결실을 맺었다. ‘불교미술공모전’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그의 제안과 추진으로 시작된 불교미술공모전은 현재까지 이어지며 전통 계승과 현대적 창작의 길을 이어주는 통로가 되고 있다. 1993년 동국대박물관 개관 30주년 기념전으로 열린 ‘고려불화전’ 역시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며 이룩한 굵직한 성과다. 일본이 대다수를 소장하고 있던 고려불화를 한국으로 이운,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중국불화로 오인되던 고려불화에 대해 전 세계의 오해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며 가장 큰 보람으로 손꼽는 이유다.

이 모든 일이 한 사람의 노력과 성과라 단정할 수 없다. 스스로도 “많은 이들의 도움과 선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오직 지중한 불교와의 인연,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가 있었기에 많은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공을 돌린다.

수없이 부딪히고 좌절했다. 때로는 화두를 푸는 수행자의 처절함과 다를 바 없었다.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자신을 던져야 하는 고난의 길이기도 했다. 한 개인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경제적 어려움과 일신의 고단함은 차라리 견딜 수 있었다. 인식 부족에서 오는 좌절과 오해에서 비롯된 모함과 시기, 무엇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 이가 겪어야 했던 실패의 쓴 경험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2019년 부처님오신날 조계종 불자대상을 수상(위 사진)한 홍윤식 교수는 상금 1000만원을 모교인 동국대 불교학술원 발전 기금으로 희사(아래 사진)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했던 길에서 한 번도 한 눈 팔지 않았다. 교사로, 재가종무원으로, 문화재위원으로, 그리고 대학교수로 직함과 자리는 바뀌었지만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던 원력이 있었다. 사사로운 욕심이나 영달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불자의 굳건했던 신심과 자긍심이 그를 지켜준 갑옷이 되었고, 학자의 열정과 사명감이 원동력이 되었다. 무엇보다 유·무형 문화재가 밀접히 결합돼 있는 불교문화의 특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정립돼야 한다는 신념, 불교문화가 우리 전통문화의 중추로 올바르게 평가돼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헤쳐올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수많은 후학들이 그가 개척한 길을 걸으며 학문의 결실을 맺고 불교문화를 21세기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거듭 꽃피우고 있다.

그 모든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에게 조계종은 2019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 ‘불자대상’을 수여했다.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한편 시대에 발맞춘 한국불교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선정이유는 그가 평생 일궈온 불사에 대한 헌사이자 감사함의 표현이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으로부터 상을 받은 노교수는 상금으로 받은 1000만원을 모교인 동국대 불교학술원 발전기금으로 희사했다. “한평생 의지처가 되어주신 부처님의 가피와 학문의 든든한 터전이 되어준 동국대에 보답하는 마음에서 불교학 연구에 작은 보탬이 되고 싶다”고 기부의 뜻을 밝혔다. 노교수의 소박한 인사말 속에는 그가 걸어온 길과 원력이 진득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모든 출발점은 불교와의 지중한 인연이었다. 훌륭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법보종찰 해인사가 운영하던 진주 해인고등학교를 거쳐 종립대학인 동국대 역사학과에 진학했다. 신심 깊은 불자였던 부모님 덕에 일찍이 불연을 맺었지만 해인고와 동국대는 그가 경전을 공부하며 직접 불교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후일 홍 교수는 “돌이켜 보면 나의 소년 시절은 캄캄한 어둠의 세계였으나 불교를 만나면서 점차 그 어둠이 밝아져 온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는 말로 불교가 그의 일생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대변했다.

 

 

종교·사상·삶의 총체로 불교문화 이해해야 올바른 전승도 가능

인재양성 목표 추진한 불교미술공모전

‘자리욕심’ 오해 부르자 일본 유학 결행
93년 ‘고려불화전’ 개최로 미술사 한 획
“사심 없었기에 화주도 망설이지 않아”

가장 보람된 일로 망설임 없이 ‘고려불화전 개최’를 손꼽는 홍 교수에게서 불교를 향한 애정이 연꽃처럼 피어난다.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국악예술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임하며 어린 시절 꿈이었던 교육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1960년대 국악예술고등학교는 판소리, 민요, 승무, 살풀이 등 무형문화재를 발굴하고 기능자를 육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무형문화재 발굴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형문화재는 아악, 종묘제례악 등 궁중음악 중심이었다. 민속음악을 발굴해 추가하는 작업에 ‘조사 보조자’로 함께 했다.

“처음엔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현장 조사를 다니면서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승무, 탈춤, 인형극과 각종 민요 대부분이 불교적 소재나 불교적 의식을 토대로 형성돼 있는데 정작 불교의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은 전무해 보였어요. 하나같이 불교를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죠. 민속화 되기 전 불교예술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를 찾는 일이 화두가 되었어요.”

종립학교에서 수학하고 경전을 접했던 안목이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 자리매김하고 있던 불교의 영향력을 단숨에 간파해 냈다. 그의 관심은 불교문화의 근원을 찾는 쪽으로 급물살을 탔다.
전통 가곡의 대가 홍원기 선생으로부터 “가곡 소리가 ‘인도소리’에서 영향 받았다”는 조언을 듣고 스님들을 수소문했다. ‘인도소리’가 범패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전국 사찰과 스님들을 찾아 범패를 녹음하고 의식무를 촬영했다.

“불교정화 직후였기 때문에 범패 같은 의식들을 무당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여겼어요. 일제강점기 사찰령으로 범패와 의식무용을 금지시켰던 까닭에 가뜩이나 사라져가는 것을 찾아내기도 힘든 와중에 인식까지 왜곡돼 있었으니 발굴이 쉽지 않았죠.”

범패를 하는 스님에 관한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찾아갔다. 사비를 털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의식에 사용되는 번, 탱화, 불구 등으로 관심은 확장돼 나갔다. 범패를 무형문화재로 등재시켜야 한다는 결심도 굳어졌다. 다행히 이즈음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위촉돼 봉원사를 중심으로 한 송암 스님 계통의 범패를 무형문화재로 등재시키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범패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불교문화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특히 조계종 총무원이 불교문화 발굴·계승에 관심을 보였다. 총무원에 문화과가 신설되고 과장의 책임이 맡겨졌다. 조계종 산하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유형문화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시작됐고 오래지 않아 성보보존위원회가 구성됐다. 불교문화재에 대한 우리사회의 통념을 성보로, 예경의 대상으로 전환시켜야 된다는 종단의 뚜렷한 지향점이 확립된 계기였다. 그가 지금까지도 가장 보람된 일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 결실이다.

노교수의 서재는 책으로 빼곡하다. 아흔을 바라보지만 지금도 읽고 쓰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성보보존위의 의견을 수렴해 단청문양조사사업을 시작했다. 국고 500만원을 받아 서울·경기지역 10개 사찰의 단청을 조사하는 사업이었다.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큰돈이었다. 2개월이면 조사를 마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총무원으로 입금된 조사비는 예상만큼 빨리 집행되지 않았고 그만큼 조사는 늦어졌다. 사업을 끝내지 못하면 지원받은 예산을 반환해야 했다. 서둘러 조사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로 사찰의 단청문양을 조사했다’는 소식에 언론의 관심이 쏠렸지만 곧이어 조사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경험부족이 낳은 결과였다. 재조사를 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겠다고 했지만 더 이상 예산 지원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받았던 수당을 모두 내놓고 사채까지 빌려 조사비용을 충당했다.

공은 고사하고 빚만 남았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단청뿐 아니라 불화를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는 홍 교수는 “유·무형 전반으로 시야를 넓힌 소중한 경험이었다” 회고한다.

단청문양조사 실패를 경험삼아 내실 있는 불교문화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성보의 의미를 되살리고 그 가치가 현대에 수용될 수 있는 방법, ‘불교미술공모전’이 떠올랐다. 문화계의 수많은 인사들과 접촉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재정이 걸림돌이었다. 재계 인사들과 스님들을 만나 화주를 했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심이 없었으니까 부끄럽지 않았아요. 전통을 계승하면서 불교미술을 오늘날에 맞게 창의적으로 제시할 인재를 찾기 위한 공모였습니다. 그런 인재들이 모여야 성보를 문화재로만 대하는 인식도 개선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죠.”

첫해의 공모전은 대부분 유명 불교문화재에 대한 모작이 대부분이었지만 불교미술공모전이 거듭되면서 불상, 탱화 등 불교문화 전반에 대한 창의적 해석이 확산됐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마음 같지 않았다. 불교미술공모전을 계기로 동국대에 불교미술학과가 개설되자 “전공자도 아니면서 대학교수 자리를 만들려고 공모전을 추진한 것 아니냐”는 오해와 시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련 없이 자리를 던지고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억울한 마음 컸지만 오기도 발동했다. “불교미술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 보겠다.” 36살 만학도의 유학이었다.

어렵사리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문화사와 불교사상사를 공부했다. 유학 전 몸으로 뛰며 현장에서 접한 범패, 불교의식, 불화, 단청 등에 대한 조사활동이 모두 학문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불교미술공모전과 불교미술학과 신설 등을 추진했던 실무경험도 불교문화를 현실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지난 시간 그가 경험하고 겪었던 온갖 어려움과 보람 무엇 하나 허투로 버릴 것이 없었다.

일본서 돌아온 후 원광대를 거쳐 동국대 교수로 재임하며 불교문화재와 문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90년 동국대박물관장 소임을 맡게 된 홍 교수는 1993년 박물관 설립 30주년을 맞이해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성과를 이룩했다. 바로 ‘고려불화 특별전’ 개최였다. 고려불화 한국 전시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조차 성공하지 못했던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일본유학과 조사 작업 등을 통해 인연 맺었던 일본 측 인사들과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30여점의 고려불화 대여에 성공했다. 그렇게 성사된 ‘고려 영원한 美, 고려불화 특별전’은 “고려불화의 고향 나들이”로 회자되면서 불교미술사에 또 하나의 획을 남겼다.

홍 교수는 1995년 설립된 문화예술대학원 초대원장으로 문예창작, 연극·영화와 함께 불교문화학과를 개설 불교 미술, 음악, 문화재 전공을 세분해 교육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가 평생 염원해 온 불교문화에 대한 인식 정립과 전문가 양성, 유·무형을 망라한 불교문화 전반의 계승과 현대적 창작의 틀이 비로소 마련된 것이다. 박물관장 7년, 문화예술대학원장 4년4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2002년 2월 정년퇴임을 하는 그 순간까지 그의 생은 그렇게 불교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한 길로 매진해 왔다.

“불교는 종교이자 사상이며 문화의 근간입니다. 의식에 담긴 의미와 문화재에 담긴 양식도 교리와 사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바르게 계승하고 전수할 수 있습니다. 불교문화는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밝히고 연구하는 것이 내 생의 가장 큰 보람입니다.”

노교수의 당당함은 태산보다 굳건하다. 그가 소년시절부터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황매산은 조선 개국을 이끌었던 무학대사를 비롯해 수많은 선승들이 정진하던 수행터였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내딛던 인천의 스승들, 그 형형한 안광이 그를 통해 오롯이 이어지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519호 / 2020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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