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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

기자명 현진 스님

최강의 지혜 도구 삼아 해탈로 가는 법

‘금강’, 지혜의 뛰어남 강조
지혜도 쓰고 버릴 도구일 뿐
경명에 나타난 궁극적 의미
피안으로 ‘건너가다’에 방점
수행경이라는 본 의도 담겨

우리가 흔히 ‘금강경’이라 일컫는 이 경전의 한문명은 ‘능단금강반야파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인데, 원전인 산스끄리뜨어 이름에서 뜻으로도 옮기고 소리로도 옮긴 말을 섞어놓은 까닭에 아예 산스끄리뜨어로 된 경명을 살펴보는 것이 오히려 간단할 것 같다.

산스끄리뜨어로는 ‘와즈라체디까 쁘라즈냐빠라미따 쑤뜨람(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ṁ)’이니, ‘금강(vajra)도 끊어버릴(chedika) 수 있는 지혜(prajñā)로써 피안으로(pāram) 건너가는(√i) 상태(tā)에 대한 경전(sūtra)’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가장 단단한 물질인 다이아몬드를 일컫는 금강(金剛)으로 번역된 와즈라(vajra)는 ‘가장 단단하다’는 의미로는 상통할지 몰라도 보석인 금강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도의 신화에 의하면 선신의 무리와 악신의 무리는 늘 엎치락뒤치락하며 투쟁을 일삼는데, 또 다시 궁지에 몰린 선신들을 위해 다디찌(dadhīci)라는 선인이 자신을 스스로 불태워 생긴 유골을 공예의 신에게 건네주게 하여 그 어느 무기로도 파괴시킬 수 없는 가장 단단한 절대무기를 만들게 한다. 그리고는 선신의 우두머리인 인드라에게 건네주게 하니, 원반형으로 중간에 구멍이 뚫린 그 무기는 적에게 날아가 적수의 목을 베고 다시 돌아오도록 되어있는데, 부딪치는 모든 것을 파괴시켜버릴 때 항상 불꽃을 일으키기에 ‘인드라의 번개’로도 알려져 있다. 인드라는 이 와즈라로써 악신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한다.

그러기에 금강(金剛)은 와즈라를 뜻옮긴 말이다. 그런 와즈라도 끊어버리는, 즉 파괴시켜버릴 수 있는 지혜[般若]를 일컫고 있으니, 금강이란 그저 지혜의 뛰어남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꾸밈말일 뿐이다. 그러면 ‘금강경(金剛經)’보단 ‘반야경(般若經)’이 경명으로 더 적합할 것 같은데, 기실 ‘지혜로써 피안으로 건너가는…’이라는 해석에 의한다면 ‘지혜’ 또한 쓰고 버릴 도구일 뿐이지 목적이 될 만한 궁극적인 것은 아닌 셈이다.

그리고 피안(彼岸, 건너편 저 강 언덕)이란 것도 건너갈 목적지를 제시한 것일 뿐이기에, 이 경전의 이름에서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건너가다(√i)’란 글자에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와즈라도 손쉽게 깨부술 수 있는 최강의 지혜를 도구 삼아 저 건너편 해탈의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에 대해 언급해놓은 경전’이 금강경 경명의 뜻번역이 된다. 금강경(金剛經, 다이야몬드 경전)이나 반야경(般若經, 지혜 경전)이란 드러난 이름 뒤에 수행경(修行經, 수행 할 것을 강조하는 경전)이란 이 경전 본래의 의도가 경명에 드리워져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로, 혹은 ‘이와 같이 나에 의해 들렸다’로도 해석될 수 있는 ‘여시아문’은 빠알리어로 된 초기경전은 물론이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500년 정도가 지난 기원 전후부터 시작되었으며 산스끄리뜨어로 된 대승불교의 경전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불교 이전의 브라만교부터 있어왔던 말이며, 어떻게 보면 다분히 비(非)불교적인 말로도 간주될 수 있다.

여시아문은 산스끄리뜨어로 ‘에밤 마야 싀루땀(evaṁ mayā śrutam)’인데, 글옮긴 말로는 ‘이렇게 나에 의해 들려졌다’가 된다. 인도문화에서 여시아문이란 표현이 실린 시조쯤으로 간주될 수 있는 책은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veda)이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베다는 인간이 저술한 책이 아니라 절대존재인 브라흐만(brahman)이 읊조린 내용을 인간 가운데 르싀(ṛṣi)라 일컬어지는 일군의 성인들이 열린 귀로 알아듣고는 들려진 음성 그대로 기억했다가 기록이 아닌 구전(口傳)으로 후대에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들렸다'라는 수동형으로 표현된 것은 절대존재에 대한 찬미이기 이전에 인간의 불완전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는 기독교의 원죄론(原罪論)과 비견되는데,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교의, 아니 이 경전에도 각인되어 있는 중생상(衆生相)에 해당된다. 단지 이 말투뿐만 아니라 인도 언어의 기본이 수동형으로 되어있는 것에서 그들의 사고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것이 불교로 옮겨오며 신에 대한 찬미에서 위대한 스승에 대한 존경으로 그 색깔을 조금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19호 / 2020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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