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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학은 의심이다

쉼 없이 질문하며 머무르지 않는 철학은 자유롭다

불자들에게 서양 행복론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위험
철학은 끝없이 의심하며 결론 집착 않는 불교와 비슷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철학은 의심이다. 철학자는 묻고 또 묻는다. 나는 내 서양철학개론 첫 강의도 질문으로 시작한다.

“마이클, 자네는 왜 내 강의에 들어와 앉아 있나?”
“교양 학점을 채우려고 그럽니다.”
“교양 학점은 왜 채우려 하나?”
“그래야 졸업할 수 있으니까요.”
“졸업은 왜 하려 하나?”(일부 학생들이 웃기 시작한다.)
“대학 학위가 있어야 좋은 직업을 잡을 수 있습니다.”
“좋은 직업은 왜 가지려 하나?”(더 많은 학생들이 웃는다.)
“좋은 직장이 있어야 돈을 더 벌 수 있으니까요.”
“돈은 왜 더 벌려 하나?”(이쯤 되면 학생 모두가 웃는다.)
“더 신나고 즐겁게 살려고 그러지요.”
“왜 더 신나고 즐겁게 살려 하나?”
“그것이 행복 아닙니까. 행복해지고 싶어 그럽니다.”
“왜 행복해지려고 하나?”
“???”

학생들은 왜 행복해지려 하느냐는 질문에는 더 이상 답변하지 못한다. 고대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이, 행복은 그 자체로 좋은 삶의 궁극적 목표이지 그것이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행복해야 하느냐는 물음은 실은 물어져서는 안 되는 부적절한 질문이다. 이렇게 학생들과 몇 차례 신나게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다 보면 그들의 강의 수강뿐 아니라 동아리 활동과 아르바이트 등 모든 행위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 모두 동의한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우리 개개인의 이런저런 행위는 결국 모두 행복을 향한 수단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런 통찰로부터 ‘모든 행위의 목적은 행복이다’라는 근사한 철학적 명제가 제시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방금 살펴보았듯이, 평범한 질문 몇 번으로 깨달을 수 있는 진리다. 나는 이렇게 평이하게 질문하는 태도가 철학하는 태도이고, 그렇게 질문하는 삶이 철학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인들은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이라는 아리스토델레스의 견해를 수천 년 동안 믿어 의심치 않아 왔다. 그러나 동양 문화권에서 다른 지혜를 쌓아온 눈 밝은 불자들에게는 이런 행복론이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다소 위험하게까지 비친다. 우리는 불교적 관점에서 던져 볼 만한 질문 몇 개로 서양 행복론의 문제점을 드러낼 수 있다.

“제시카, 행복을 어떻게 달성하려 하는가?”
“돈 많이 벌어 신나게 즐기면서요.”
“돈은 어떻게 많이 벌 수 있는가?”
“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 됩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려가면서…”
“그렇다면 승리하기 위해서는 종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

문답이 여기쯤 이르면 학생들은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행복론이 서로간의 과열 경쟁을 부추켜 우리 사회를 위험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자와 서비스는 언제나 한정되어 있는데 그것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구와 집착으로 사람들은 스스로와 서로의 삶을 고통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곤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회 갈등과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행한 사태가 이렇게 행복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 사람들에 의해 야기되어 왔다. 행복에의 집착도 집착이다. 실은 대단히 위험한 집착일 수 있다.

한편 서양식 행복론이 이론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점도 질문 몇 개로 밝힐 수 있다.

“팀, 만약 자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지 못하면 어떨 것 같은가?”
“실망할 겁니다. 그러나 더 열심히 노력해서 행복해지려 할 겁니다.”
“그래도 행복을 못 얻으면?”
“좌절할 겁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더 노력할 겁니다.”
“그래도 결국 안 된다면?”
“너무너무 고통스러울 겁니다. 제 인생은 실패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가능성을 십분 활용하고 실현하는 삶을 살기가 그리 쉬울까? 결코 그렇지 않다. 굳이 오늘날 전 세계의 ‘흙수저’들을 거론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서양의 행복론에 의하면 그렇게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은 모두 행복하기 위한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것은 모든 중생이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원하는 불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다. 게다가 실현하려는 가능성이 어떤 종류의 가능성이어야 하느냐는 문제도 있다. 어떤 사람이 타고난 연쇄살인범으로서의 가능성을 십분 발휘해야 그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가능성 그 자체에 대한 논의가 더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런 행복론은 특별히 전해 주는 내용이 없다.

수천 년 동안 전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도 위와 같이 문답을 몇 차례 반복하면 곧 그것이 가진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연재의 첫 에세이에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려 한 질문하는 지성의 힘, 의심하는 마음의 힘, 그리고 철학하는 삶의 힘이다. 철학이란 이렇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작업이다. 철학은 어떤 답변에 대해서도 그 근거를 다시금 묻기 때문에 완성되어 고정된 체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철학적 질문에 대해서도 확정된 결론이 없다. 예를 들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의지는 인과(因果)로부터 자유로운가,” “원인과 결과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정신은 물질적 토대에 의존하고 있는가” 등의 문제는 수천 년 동안 그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들에 의해 계속 논의되어 왔지만 아직 철학자들이 동의하는 답변이 존재해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쉼 없이 질문하며 머무르지 않는 철학은 자유롭다. 그러면 끊임없이 의심하며 아무 결론에도 집착 않는 철학이 불가의 수행과는 얼마나 다를까? 이 또한 답 없는 질문으로 남을 것 같다. 화두라면 더 좋겠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19호 / 2020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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