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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진의 참뜻

기자명 마성 스님

불건전한 생각·행위 단속하고 건전한 생각·행위 증장

부처님 입멸 전 마지막 유언은 방일말고 해야할바 완수를
경전서 ‘정진’ 의미하는 말 위리야는 열정, 와야마는 정정진

수좌 스님들이 선방에서 안거에 들어 화두를 참구하며 용맹정진하고 있다. 벽면에는 각자의 소임을 적은 용상방을 걸어 두었다.
수좌 스님들이 선방에서 안거에 들어 화두를 참구하며 용맹정진하고 있다. 벽면에는 각자의 소임을 적은 용상방을 걸어 두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불교용어는 ‘정진(精進)’이다. 붓다도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다. 정진 없이는 그 누구도 궁극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붓다는 입멸직전 제자들에게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완수하라(vayadhamm ā saṅkhāra appamādena sampād etha)”고 당부했다. 궁극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라는 붓다의 마지막 유훈이다.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빨리어 위리야(viriya), 와야마(vāyāma), 빠다나(padhāna) 등은 모두 ‘정진’을 의미한다.

첫째, 위리야(viriya)는 에너지, 근면, 열정, 노력, 끈기, 분투 등으로 번역된다. 위리야의 문자적 의미는 ‘강인한 인간의 상태’ 혹은 ‘남성다움’이다. 베다 문헌에서 이 용어는 영웅적 행위나 남성성과 관련된 것으로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위리야가 일반적으로 수행자의 ‘에너지’ 또는 ‘실천’을 가리키며, 해탈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위리야는 건전한 활동에 기꺼이 참여하는 태도로 정의된다. 그 기능은 건전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와야마(vāyāma)는 팔정도의 여섯 번째 ‘바른 노력(正精進, sammā-vāyāma)’으로 나타나며, 빠다나(padhāna)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두 번째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sammappadhāna)’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팔정도에 나오는 ‘바른 노력’의 내용이 곧 ‘네 가지 바른 노력’이다.

‘네 가지 바른 노력’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해로운 법이란 불선법(不善法, akusala- dhamma), 즉 불건전한 행위를 말하고, 유익한 법이란 선법(善法, kusala-dhamma), 즉 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한때 사리뿟따 존자는 스승인 붓다께서 설한 ‘네 가지 바른 노력’에 대한 법문은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지 못하는 위없는 법문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만약 우리가 궁극의 목적을 위해 ‘네 가지 바른 노력’을 실천한다면 반드시 선(善)이 증가하고 악(惡)이 감소하여 향상일로(向上一路)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든 이와 같이 노력한다면, 개인과 사회는 점차 밝고 선한 세계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른 노력(正精進)’은 개인생활에서도 사회생활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삼십칠조도품의 오근(五根)과 오력(五力)의 두 번째 정진의 기능(精進根)과 정진의 힘(精進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중에서 세 번째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 등에서 정진이 강조되고 있다. 그만큼 정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압빠마다(appamāda)는 정진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초기경전에서 정진의 의미로 쓰인다. 빠마다(pamāda)는 방심함, 게으름이라는 명사인데, 여기에 부정접두사 아(a)가 덧붙여진 압빠마다는 깨어있음, 성실함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불방일(不放逸)로 번역된다. 이를테면 “깨어있음은 죽음이 없는 상태이고, 방심함은 죽음의 상태이다. 깨어있는 이들은 죽지 아니하고, 방심한 이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Dhp.21)

이 게송에서 말하는 ‘압빠마다’는 육체적으로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즉 마음에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마음에 건전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더욱 증장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흔히 며칠씩 잠을 자지 않고 참선한다든가, 오체투지의 예배를 하는 행위 등을 용맹정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건전한 생각이나 악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하루 종일 예배하더라도 그것은 정진이라고 할 수 없다. 정진의 참뜻은 불건전한 생각과 행위를 단속하고 건전한 생각과 행위를 증장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해로운 법들과 유익한 법들을 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에서 두 번째에 택법각지(擇法覺支)를, 세 번째에 정진각지(精進覺支)를 두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익하거나 해로운 법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법들이 있다. 그것을 매순간 알아차리고 유익한 법들을 간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진이다. 이처럼 정진은 깨어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때 붓다는 육군비구(六群比丘)로 알려져 있던 앗사지(Assaji)와 뿌납바수까(Punabbasuka) 비구에게 이렇게 설한 적이 있다.

“비구들이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존재의 족쇄를 부수었고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MN.Ⅱ.477)

“비구들이여,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지만 위없는 유가안은을 원하면서 머무는 유학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들은 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선우들을 섬기면서 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열매를 보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MN.Ⅱ.477)

정진이 필요한 사람과 정진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법문이다. 해야 할 바를 다하지 못한 범부는 정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새해 새아침이 밝았다. 해야 할 바를 위한 정진의 한 해가 되기를 염원한다. 우리 모두 정진합시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20호 / 2020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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