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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리는 무엇일까 - 사리의 의미와 사리신앙의 다양한 모습들

기자명 신대현

석가모니 사리 스투파 봉안 뒤 사리신앙 확고해져

불사리 독차지 하려는 전쟁 발발 위기상황서
사리를 8등분함으로써 불교발전 토대 마련
벽화 등 사리 분안 소재의 작품들 다수 남겨
스승의 가르침대로 수행정진 마음유지 가능

석가모니 사리 공양의 장면을 조각한 돌기둥. 통일신라시대, 경주국립박물관 소장.
석가모니 사리 공양의 장면을 조각한 돌기둥. 통일신라시대, 경주국립박물관 소장.

돌아가신 조상이 남긴 몸을 후손들이 땅에 묻고 기리는 풍속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왔던 풍습이다. 영혼이 뼈에 깃든다고 생각해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모아 따로 모시기도 했다. 유골을 통해 후손들이 조상들의 영혼과 연결된다는 고대 조령(祖靈) 신앙의 한 모습이다. 보통사람의 유골도 이러하였으니, 만인이 믿고 의지하던 성자(聖者)에 대해서는 더욱 특별한 숭앙심이 표출되는 것은 당연했다. 약 30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 수행자로서 뭇 사람들의 커다란 존경을 받다가 열반한 고타마 싯달타가 바로 그렇다. 

한계를 넘어선 모진 고행과 갖은 수행을 섭렵한 뒤 깊고 그윽한 선정을 통해 진리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싯달타는, 그 뒤 50년에 걸쳐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얻은 순정의 법을 전파하는데 진력하였다. 하지만 정신은 이미 부처가 되었어도 몸은 아직 인간의 몸에 머물렀기에 어느덧 노경에 접어들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즈음 부쩍 쇠약해진 스승을 근심으로 바라보던 제자 아난타가 다가와서는 입적하시고 나면 다비해야 할 텐데, 사리가 나오면 어떻게 모시면 좋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여쭸다.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그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말라. 수행자들은 모름지기 최고의 선(善)을 얻기 위해서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정근하려는 데에만 온힘을 쏟아야 하느니라. 내 사리를 공양하는 것은 현자들과 장자들이 근심하면 될 일이다.”(‘대반열반경)

이 말에서 제자들이 자신의 죽음 때문에 자칫 수행에 전념하지 못할까봐 염려하는 석가모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잡힌다. 제자들과 신도들이 스승의 사리를 스투파 안에 모신 것은, 사리를 통해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기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석가모니는 자신의 사리가 장차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큰 힘이 될 것임을 이미 내다봤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사리신앙은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석가모니의 입적 직후 불사리를 모시는 과정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우여곡절이 숨어 있었다. 잘못 되었다면 사리신앙이 아니라 자칫 ‘사리전쟁’이 되었을 지도 몰랐을 사정이 있었다.

당시 인도 땅은 말라(Malla) 족을 비롯해 여덟 부족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들 모두 석가모니의 위광이 자신들의 땅에도 비추기를 바랐기에 열반 후 사리가 8말 4되나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사를 석가모니가 입적한 쿠시나가라로 출동시켜 독차지하려 했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벌어질 때 바라문 드로나(Drona)가 나섰다. 그는 불사리를 골고루 나누자고 제안하고는 부족 대표들을 모아 미리 단지 안에 넣어 두었던 사리를 꺼내 균등하게 나눔으로써 모두가 만족해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각 부족마다 사리를 봉안한 탑이 세워졌고, 이를 계기로 사리신앙이 한껏 고조되어 불교가 더욱 발전하게 되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유명한 사리팔분(舍利八分)의 고사이자 최초의 불탑인 근본팔탑(根本八塔)이 세워진 경위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뒷얘기도 전한다. 불사리를 단지에 담을 때 드로나는 사람들 몰래 단지 안쪽 깊숙이 진한 꿀을 발라놓아 작은 사리조각들이 꿀에 붙어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배분을 잘 마친 그는 단지를 고향으로 갖고 와 이 사리들을 봉안해 탑을 세우니, 이것이 곧 병탑(甁塔)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최초의 사리기(舍利器)는 꿀단지였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석가모니 열반 후 불사리를 처음 봉안한 일은 사람들에게 워낙 극적이고도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져 이후 각국에서 벽화나 조각 등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인도 키질 동굴 벽화에 그려진 ‘사리팔분도’ ‘사리단지를 들고 있는 드로나’ 통일신라의 ‘사리공양 돌기둥(국립중앙박물관)’ 등 사리 분안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사리신앙에 관한 기념비적 작품들이다. 

2,500여년 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한 불교가 이후 세계 종교로 발전한 데는 사리신앙 말고도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이후 등장한 고승석학들의 불교 이론을 집대성한 불경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불경을 통해 지역과 시대의 제한을 넘어서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불교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경은 석가모니 입멸 후 100년이 지나서야 편찬되기 시작했으니, 그 동안의 신앙적 공백은 어떻게 메울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빈자리에 바로 사리신앙이 있었다. 진신사리는 곧 석가모니의 분신이나 다름없기에 제자와 신도들은 책이 없어도 사리를 대하며 스승의 가르침대로 수행에 정진할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리는 죽은 다음에야 나온다. 하지만 그 사리로 인해 다시 새로운 믿음이 일어난다. 생과 멸이 하나이며 서로 이어지는 원리가 사리에 드러나 있다. 또 사리는 탑 안에 놓인다든지 해서 여간해서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꼭 필요할 때가 되면 나타나 사람들의 어려움을 풀어주고 희망을 던져준다. 이렇게 최고의 덕이 있으나 자랑하지 않고, 화려함이 넘치나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 것, 이처럼 단 한 번의 드러냄으로써 영원을 설파하는 은자(隱者)의 미덕이야말로 사리의 진정한 가치인 것 같다. 무엇보다 부처님의 고귀한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던 후세 사람들도 불사리를 예경하면 마치 석가모니를 마주한 듯 실감나게 신심이 나게 되니, 이로써 불교가 영원히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종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논리 정연한 이론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종교는 이론과 머리로서만 이해되는 대상이 아니다. 신앙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 글이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적(異蹟)들을 경험할 때 비로소 차원 높은 믿음을 갖게 된다. 불교를 예로 든다면 사리신앙이 바로 그것이다. 사리신앙은 석가모니 열반 후 오랜 세월을 거치며 나무의 나이테 마냥 갖가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역사의 나이테에 아로 새겨놓았다. 앞으로 이런 사리신앙의 모습과 흔적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20호 / 2020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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