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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혜 사랑

“본질 언급해야 가능한 정의는 처음부터 불가능”

모든 사물은 조건에 연기하며 각각 다른 물건으로 간주
지혜 자체도 자성이 없이 공하기에 직접 말하기 어려워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세계적으로 저명한 20세기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철학자 러셀을 기차역까지 운전해 주던 택시기사의 일화가 있다. 30년 넘게 러셀을 태우고 다녔던 그가 어느 날 뒷좌석에 앉아 있던 러셀에게 물었다.

“교수님,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

이 택시기사가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이보게들, 아 글쎄 러셀 교수님이 철학이 무엇인지를 모르시더라고!”

세계적인 철학자가 철학이 무엇인지를 답하지 못했다는 이 일화는 철학을 정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들도 여럿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이 질문에 시원하게 답해 주지 못한다.

그런데 공(空)의 가르침에 밝은 불자라면 철학뿐 아니라 이 세상 아무 것도 제대로 정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펜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려면 펜을 펜이게끔 해 주는 그 무엇, 즉 펜의 본질 또는 자성(自性)을 밝혀 언급해야 할 텐데, 연기(緣起)하여 공하기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물의 자성을 어떻게 밝혀내란 말인가. 이 점을 보여주는 내 강의실 대화를 하나 소개한다.

“제임스, 자네가 손에 쥔 길쭉하게 생긴 물건은 무엇인가?”
“펜입니다.”
“펜이란 무엇인가?”
“필기도구입니다.”
“그래? 그런데 그것을 마치 스파이 영화에서처럼 사람의 목을 찌르는 데 쓴다면?”
“그러면 펜이 아니라 살인무기입니다.”
“그것을 유명한 디자이너가 귀금속으로 멋지게 장식해 박물관에 전시한다면?”
“예술품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펜도 그것이 속하는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즉 조건에 연기하며 각각 다른 물건으로 간주된다. 사물에 고정된 본질이나 자성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본질을 언급해야 가능한 정의는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초반 세기의 천재라던 케임브리지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단어나 개념도 제대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고 우리는 그것이 각각의 맥락에서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 그 의미를 가늠할 뿐이라고 통찰했는데, 이 사람 아무래도 전생에 연기와 공을 깨친 불자였던 것 같다.

일상에서 익숙한 물건 하나도 정의하지 못하는데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에 답하기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서양철학개론 수강생들의 답변은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된다. 

“철학이란 모든 학문의 근원입니다.” 
“돈벌이 어려운 인문학의 대표 과목입니다.” 
“실존을 향한 탐구입니다.”
“엉뚱한 짓만 골라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철학자들입니다.” 
“모든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철학의 일부입니다.”……

답변이 너무 다양하다보니 공통점을 찾기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처럼, ‘철학’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각각의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자성이 없는 ‘철학’을 정의하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이럴 경우 우리는 ‘철학(philosophy)’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며 이 단어를 처음 만든 고대 희랍 사람들이 ‘philosophy’란 말을 어떤 뜻으로 쓰려 했던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philosophy’는 ‘사랑하다(philein)’와 ‘지혜(sophos)’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탄생했다. 철학이란 ‘지혜에 대한 사랑’이고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붓다, 공자, 예수, 원효, 지눌, 율곡, 퇴계 같은 분들은 모두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훌륭한 분들이 사랑했다는 지혜란 또 무엇일까? 

지혜 자체도 자성이 없이 공하기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일단 지혜(wisdom)를 비슷한 개념인 지식(knowledge)과 함께 비교 및 대조해 보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지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해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거의 언제나 좋은 답변으로 응수한다.

“지식이란 사실(facts)에 대한 정보를 말합니다.”
“지식이 풍부하다(knowledgeable)는 말은 책 많이 읽어 똑똑하다는 겁니다(book-smart).”
“지혜란 책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해 체득해야만 가능합니다.”
“경험을 통해 인간사와 세상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street-smart).”

학생들은 우리가 삶과 관련된 경험으로 지혜를 체득하게 된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개인적·사회적으로 더 좋은 삶을 연구하는 윤리학이 철학의 중요한 분야가 되는 이유도 알게 된다. 불가에서라면 경전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단계이고 다양한 종류의 수행이 지혜를 체득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만도 하겠다.

그런데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서 철학자들이 반드시 더 좋은 삶에 대한 연구만을 진행할까? 철학에는 윤리학뿐만 아니라 논리의 체계를 다루는 논리학, 지식의 속성을 연구하는 인식론, 존재의 근원을 파헤치는 형이상학 등 여러 다른 분야도 있다. 이 모두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주제들을 다룬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혜를 어떻게 이해해야 지혜에 대한 사랑이 이런 주제들에 대한 사랑도 포함할까?

한편, 지난번 에세이에서 나는 ‘철학은 의심이다’라고 하면서 마치 철학을 정의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는데, 이것은 이번에 ‘철학은 정의할 수 없다’고 한 주장과 상충하는 듯 보인다. ‘철학은 의심이다’와 ‘철학은 정의할 수 없다’는 두 견해를 과연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지혜에 대한 일상적 이해를 넘어 지혜를 좀 더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이 둘을 일관된 통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 단락에서 제기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다음 에세이에서 이 문제를 다뤄 보겠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20호 / 2020년 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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