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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불갑사 주지 만당 스님 기고-하

기자명 만당 스님
  • 기고
  • 입력 2020.01.20 11:27
  • 수정 2020.01.20 13:15
  • 호수 1521
  • 댓글 2

“난랑비서의 ‘축건태자’는 마라난타가 간다라 출신임을 함축”

‘축건태자’는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로 수행하던 시절 통칭
간다라엔 부처님 전생담 유적 다수…‘축건’도 간다라 지칭
‘불국기’ 근거할 때 마라난타 고향은 간다라 ‘마르단’ 유력

파키스탄 내 옛 간다라 지역 다르마라지카 유적지의 마애불상. 조계종 총무원 제공

‘해동고승전’은 석법운(진흥왕)전을 기록하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조 37년 기사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여 전재해 놓고 있다. 그 가운데 최치원(857~908이후)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의 내용 일부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것은 실로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백성을 상대로 교화하였다.…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축건 태자의 교화였다.’

이에 대하여 이 교수는 “해동고승전의 찬자 각훈이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鸞郞碑序)를 인용하고 있다”고 하면서, ‘축건’을 ‘천축’이라는 뜻으로 썼음이 분명하므로 각훈 스님도 축건이 천축을 의미한다는 것을 몰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교수는 이 부분을 서술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교묘한 기교를 부리고 있다. ‘해동고승전’(1215년)을 찬술한 각훈 스님이 난랑비서문을 인용한 것이 아니고, ‘삼국사기’(1145년)를 저술한 김부식이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의 내용 일부를 인용했다. 각훈 스님은 70년 후에 ‘삼국사기’의 진흥왕 관련 내용을 그대로 ‘해동고승전’에 전재하여 실었던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난랑비서의 내용을 가지고 각훈 스님이 축건이 천축을 의미함을 알았느니 몰랐느니 하는 논리 주장의 전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앞에서 본 것처럼 각훈 스님은 천축과 축건의 의미를 구분해서 쓰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둔다.

이제 난랑비서의 내용을 다른 측면에서 고찰해 보겠다. 최치원은 ‘제악막작 중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諸惡莫作 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라고 하였는데, 왜 최치원은 ‘석가모니’나 ‘불타’라고 안하고 성불 이전의 보살의 단계인 ‘태자’라고 하였는지, ‘천축’이라는 용어를 안 쓰고 ‘축건’이라는 표현을 썼는지에 대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 교수는 ‘축건태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바꾸어 쓴 말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그렇게 쉽게 평하고 넘어갈 사항이 아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부처님의 ‘전생담(Jataka)’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간다라에는 유난히 부처님이 전생 보살로서 수행하실 때의 전생담이 많이 전해져 온다. 스와트에는 부처님께서 전생에 보살로 수행할 때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를 살려주기 위해 자신의 살을 잘라내 준 곳에 대탑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탁실라에는 부처님께서 월광왕이라는 보살로 계셨을 때 여기에서 자신의 머리를 잘라 남에게 보시하셨다고 하는 곳에 대탑이 세워져 있는데, 그래서 머리를 자른다는 뜻의 ‘탁실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보살로 수행하실 때 자신의 몸을 던져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게 했다는 곳에도 대탑이 있다. 건타위국에는 부처님께서 일월명왕이라는 보살로 계실 때에 스스로의 눈을 남에게 보시하셨다는 곳이 있으며, 그곳에도 대탑이 세워져 있다.

위의 내용들은 법현 스님의 ‘불국기’(416년)와 현장 법사의 ‘대당서역기’(648년)에 기록되어 있으며, ‘본생담’에서도 그 내용들을 볼 수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가서 수학한 후 과거까지 합격하여 벼슬을 하는 등 박학다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재가 뛰어났다. 당에서 ‘불국기’와 ‘대당서역기’를 접하고 위의 내용들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난랑비 서문은 화랑들의 효행과 충성, 선행과 교화, 풍류와 기개를 나타내고 있는 글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간다라 지역에 많이 전해져 오는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의 아낌없는 보시행과 쿠나라 태자의 악행에 빠지지 않는 절개를 ‘제악막작 중선봉행’의 대표적 교화행으로 염두에 두고 ‘축건태자지화야(竺乾太子之化也)’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난랑비서의 ‘축건’은 ‘간다라’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태자(太子)’라는 표현은 ‘부처님이 성불하기 이전 보살로서 수행하던 시절을 통칭하는 의미’로 쓴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라난타존자가 간다라 출신이라면, 그 고향은 간다라의 어느 지역인지 추정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어려운 작업이다. 인도는 기록문화가 굉장히 빈약한 지역이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도 주로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들을 밝혀내기 위해서 외국의 기록들을 참고하고, 구전과 유적들을 통해서 단편들을 조합하여 맞추어 보고 추론해 나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간다라 지역은 동서문명의 교류와 융합이 활발히 이루어진 반면에 무수한 나라들의 흥망성쇠와 전란이 많았던 지역이므로 역사적 근거자료는 더더욱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라난타존자의 고향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약간의 단서를 법현 스님의 ‘불국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불국기’에 의하면 ‘숙가다국(스와트)에서 5일을 가서 건타위국(간다라)에 도착하였다.’ ‘건타위국에서 7일쯤 가서 축찰시라(탁실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건타위국으로부터 4일쯤 가자 불루사국(페샤와르)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법현 스님은 399년부터 412년까지 서역과 인도를 순례하였다. 이때는 쿠샨왕조가 에프탈족에 의하여 무너지고, 지역별 소국들의 독립적 경향이 강하던 시기여서 그런지, ‘불국기’는 지역별 소국들을 거명하여 그 지역의 사탑과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법현 스님이 인도를 순례한 시기는 마라난타존자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한 시기와 15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불국기’에 기록된 간다라 지역의 모습은 바로 마라난타존자 당시의 모습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 ‘불국기’에 기록된 ‘가장 축소된 의미의 간다라’라고 할 수 있는 ‘건타위국’이 현재 어느 지역인지를 파악해 보았다. 고대 인도에서 하루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개념인 1유순을 16km(중유순)로 보고 계산하였다. 탁실라로부터 7일이면 112km 거리이고, 페샤와르로부터 4일이면 64km 거리이다. 이 거리에 부합되는 지역은 ‘마르단’이다. 현재 마르단으로부터 탁실라가 113km, 페샤와르가 65km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숙가다국으로부터 5일이면 80km 거리인데, 현재 스와트의 중심인 밍고라는 마르단으로부터 120km 정도의 거리이다.

‘불국기’에서는 밍고라 지역을 ‘오장국’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불국기’에서 말하는 ‘숙가다국’은 마르단에서 80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착다라와 잘랄라말라칸드 지역이라고 봐야 한다. 이렇게 산정해 보면 ‘불국기’에서 기록한 일수에 따른 거리와 현재의 측정거리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지역은 바로 ‘마르단(Mardan)’이다.

이처럼 ‘불국기’에 기록된 ‘건타위국’, 즉 4세기 말경 존재했던 ‘가장 축소된 의미의 간다라국’은 마르단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지도상에서 볼 때에도 탁실라, 페샤와르, 스와트로 이루어진 삼각축의 무게중심으로 교통요지가 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마르단이다. 따라서 마라난타존자의 고향은 ‘간다라’, 그 가운데서도 ‘가장 축소된 의미의 간다라’인 ‘건타위국’의 현재 위치인 ‘마르단’ 지역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필자는 1999년부터 마라난타존자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기 위하여 처음 당도한 곳인 ‘영광 법성포’에 마라난타존자의 숭고한 불교전법의 역사를 기리기 위하여 ‘백제불교최초도래지 기념성역’ 조성불사를 영광군과 협력하여 주관해 오고 있다. 법성포(法聖浦)는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성인이 들어온 포구’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 불사를 위하여 설계사, 조각가, 건축가를 비롯한 관계자들과 수차례 간다라 불교유적을 답사하였다.

이때 두 차례는 이 교수가 거론하고 있는 한국의 모 교수와 파키스탄의 고고학자인 아쉬랍 칸 박사의 안내를 받기도 했었다. 이들은 마르단의 쵸타라호르와 훈드라는 지역을 안내하면서 마라난타존자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처음 가본 그곳은 넓은 평원에 완만하게 솟아오른 기운이 아주 좋은 지역이었고 유적발굴도 진행되고 있었다. 고향으로 추정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는가 하고 묻자, 이쪽 지역이 간다라의 중심에 위치하는 곳이므로 그렇게 추정해 보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도 그 오래전의 인물에 대한 기록이 현지에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 하면서 그 옛날 험난한 여정을 이겨내고 한국에 불교를 전해준 훌륭한 마라난타존자에 대한 고향을 추정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고 즐거운 상상이겠거니 하고 넘겼던 일이다. 그런데 이 교수는 이런 일에 대해서 그런 자료가 있느니 없느니, 근거 기록을 제시하라느니 하면서 비판을 해놓고 있는데,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기록들을 궁구해 보면 마라난타존자의 고향은 간다라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마르단 지역으로 좁혀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마라난타존자의 성씨는 ‘마라(摩羅)’인데, 마라라는 성의 갖추어진 표기는 ‘구마라(鳩摩羅:Kumar/Kumara)’이며, 산스크리트로 ‘소년, 아들, 왕자’를 뜻한다. 인도에서 ‘구마라’ 성을 가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인더스강 계곡 주변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던 부족이었고 고대로부터 도자기를 산업화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마르단에서도 인더스강에 가까운 쵸타라호르나 훈드 지역에 예전부터 구마라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을 수 있다.

만당 스님
영광 불갑사 주지

마르단 지역은 탁실라, 페샤와르, 스와트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교역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곳이다. 예부터 도자기를 산업화했던 구마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역의 중심지에 많이 거주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예상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쵸타라호르는 작은 수도라는 뜻이라고 한다. 고대 어느 시기엔가는 그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심스럽지만 ‘구마라’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을 만한 지역이며, 마라난타존자가 탄생한 곳일 수도 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1521호 / 2020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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