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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답으로 찾아가는 최고의 아름다움-바흐의 평균율

기자명 김준희

236개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서 바흐 연상

그리스 철학 등 다양한 학문과 토론·대화 즐겼던 밀린다왕
불교 향한 열망에 나가세나 존자 찾아가 사흘간 질문 공세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새 조율법·예술 동시에 이뤄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자필악보.

기원전 2세기경 인도의 일부(현재 파키스탄 지역)는 그리스의 왕이 다스린 적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 북부 인도를 지배하던 왕은 빨리어로 밀린다(彌蘭陀)로 불려지는 메난드로스(Menandros)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카불 지역에서 태어나, 왕위에 오른 후 영토를 확장하고 부유한 나라를 건설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스 철학을 비롯해 다양한 학문을 즐겼던 밀린다왕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공부하는 방법을 좋아했다.

어느 날, 밀린다왕의 신하 데바만티아가 아뢰었다. “나가세나(那先)라는 승려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지요.” 밀린다왕은 불교에 관심이 많았지만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항상 아쉬웠으므로 당장 나가세나를 만나러 가고자 결심했다.

밀린다왕이 나가세나 존자가 머무르는 곳으로 찾아가 대담을 나눈다는 소식이 인도 전역에 퍼지자 500명의 그리스인과 8만명의 비구들이 그 장면을 직접 보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밀린다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모호한 대답으로 밀린다왕을 당황시켰다. “저는 ‘나가세나’라고 불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부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라세나, 비이라세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저에게 주신 이름들입니다.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명칭, 통칭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격적 개체(인격적 자아, 실제적 자아)는 없습니다.”
 

메난드로스(B.C. 163∼105) 초상이 새겨진 동전. 뒷면은 아테네 여신.(영국박물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밀린다왕은 몹시 당황하여 질문을 퍼부었다. “지금 존자께서는 이름 속에 인격적인 개체가 없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 자리에서 저는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가세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머리털이 나가세나입니까?” 밀린다왕의 질문이 계속 되었고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도 이어졌다.

밀린다왕과 나가세나 존자의 대화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연상시킨다. 물론 ‘사물의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 ‘비판적 사고’ 중심인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그 방향에 있어서 다소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탐구’를 위해 능동적이고 반성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다. 그는 전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업적은 바로 오랜 시간동안 피타고라스 조율법(완전 5도의 음정 비율인 3:2를 기본으로 한 조율법)을 바탕으로 사용된 순정률의 부족한 점을 평균율(한 옥타브를 균등하게 12등분하여 조율하는 방법)을 통해 해결했던 점이다. 평균율을 사용하면 모든 악기로 모든 조성을 연주할 수 있다.

바흐는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두 권을 통해 당시 상용화되기 시작했던 조율법인 ‘평균율’을 확립했다. 두 권의 작품집은 C장조부터 b단조까지 24개의 모든 조성을 사용하여 작곡되었으며, 각 곡은 ‘프렐류드(Prelude, 전주곡)’와 ‘푸가(Fuga)’로 구성되어 있다. 프렐류드는 자유로운 형식으로 원래는 모음곡 등의 맨 앞에 연주되는 도입부와 같은 가벼운 느낌의 곡을 말한다. 푸가는 바로크시대의 대표적인 작곡법인 ‘대위법(Counterpoint)’을 사용하여 작곡된 곡으로 평균율 곡집의 주인공격이다. 대위법은 모든 성부에서 주요한 주제(Subject)가 나타나며 각 성부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독립성을 지니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또한 수직적, 수평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작곡법으로 음악적 논리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흐는 푸가 앞에 프렐류드를 배치함으로써 각각 질문과 답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푸가 안에서도 주제 선율이 대주제(Counter subject)와 함께 조화를 이루며 또 다른 문답형태를 담았다. 규격화된 형식 안에서 음악적, 이론적, 논리적 해답을 담고 있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그가 추구했던 진정한 음악의 정수를 표현하고 있다. 바흐가 만들어낸 이 구조는 마치 최상의 아름다움을 향한 움직임처럼 보인다.

성 토마스성당의 바흐 동상(라이프치히 소재).

이 작품집이 작곡된 당시에는(1권 1722년, 2권 1744년)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로 연주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피아노로 연주되며, 바흐가 그의 자녀들과 제자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작곡한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피아노 전공자들이 필수적으로 공부해야할 주요한 레퍼토리가 되었다. 한 음악학자는 “큰 재앙이 일어나 서양음악이 일시에 소멸된다 하더라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두 권만 남아있다면 충분히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서양 음악사에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 가지는 의의는 상당하다.

밀린다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사흘 동안 236개의 질문을 했다. 존재의 탐구에서 시작된 대화는 욕망, 업, 출가, 윤회, 열반 등의 주제를 이어가며 계속 되었다. 나가세나는 모든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했다. 바흐는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서 새로운 조율법의 기술적인 가능성을 탐구하며 예술적 표현을 동시에 이룩했다. 마치 밀린다왕의 질문에 대답하는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과 같이 대담하면서도 섬세하고 논리적이다. 또한 이 작품집을 통해 교육적 목표를 세웠다는 점도 바흐의 겸허한 자세와 인간적인 진면목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대목이며, 동시에 밀린다왕의 배움에 대한 열망도 오버랩된다.

서양의 왕과 인도 승려의 대화로 이루어진 ‘밀린다왕문경’. 밀린다왕과 나가세나가 실존 인물이지만, 실제 불법으로 이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밀린다왕문경’은 서양인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불교를 대표하는 의미 있는 경전이다. 서양의 음악으로 경전을 해석하고자 하는 필자의 시선과 가장 일치하는 경전이기도 하다. 종교와 음악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지니는 가장 훌륭한 언어이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제 1권, 첫 곡의 익숙한 선율을 감상하며 열린 마음으로 경전을 새롭게 읽어보면 어떨까. 밀린다왕의 불교에 대한 열망, 나가세나 존자의 진솔하고도 대범한 답변, 바흐의 음악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함께 느껴본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21호 / 2020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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