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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자실이 그린 조선풍의 관세음응신도

기자명 주수완

전통 도상 테두리 벗어난 창작의 선구적 사례

관세음보살보문품 바탕으로 섬세한 필치·기량 살펴볼 수 있어
공중 표현된 상단은 부처님 세계, 중생 세계는 산수화로 풀어내
조선시대 일월오봉도 느낌…아자실 역시 궁중화가였을 것 추측

도갑사 관세음32응신도, 이자실 그림, 1550년, 일본 지은원 소장. 235×135㎝.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걸작은 일본 지은원에 소장되어 있는 높이 2m가 넘는 대작 ‘관세음32응신도’이다. 이 그림은 재위한지 1년만인 1545년에 승하한 조선 12대 임금 인종을 추모하기 위해 1550년 왕비였던 인성왕후의 발원으로 왕실에서 제작되어 영암 도갑사에 봉안되었던 이력을 지니고 있다. 현재는 일본 지은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 불화를 그린 이자실(李自實)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근래 그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선조 38년인 1604년에 행해진 의과시(醫科試)에 합격한 견후증(堅後曾)에 관한 기록이 ‘의과방목(醫科榜目)’이란 책에 실려 있는데, 그의 처조부가 ‘이자실, 배련이라고도 함’이라는 기록과 함께 처부는 ‘이흥효’, 처증조부는 ‘소불’이라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한편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1569~1628)이 그와 가까이 지내던 화가 이정(李禎, 1578~1608)이 요절하자 그를 위해 지은 ‘이정애사’라는 글에 의하면 이정의 아버지는 이숭효이고, 이숭효의 동생이 이흥효이며, 이정의 조부가 배련, 증조부가 소불이라고 기록하여 견후증의 부인 집안과 동일한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즉, ‘이자실(배련)-이숭효·이흥효-이정’의 3대가 확인되는 것이다.

이숭효·흥효와 이정은 화원화가로 활동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들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이자실 역시 화가였을 개연성이 있고, 32응신도가 그려진 1550년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연배이기 때문에 그가 ‘관세음32응신도’를 그린 이자실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정의 조부가 지난번 살펴본 노비출신의 화가 이상좌라고 되어 있는 한편, 이흥효의 아버지 역시 이상좌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자실이 곧 이상좌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 ‘다른 이름으로 배련’이라고 하였으니, 그 이름이 세 개나 되는 셈이다. 아마도 성이 없이 ‘배련’이라고 기록된 것이나, 혹은 그의 부친 역시 ‘소불’이란 이름만 기록된 것은 그의 노비 시절 이름, 혹은 처음 도화서 화원에 등록될 때의 이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간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관세음32응신도’를 그린 이자실은 이후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까지 화가로 키워냄으로써 화가 집안을 일궈낸 셈이다.

그럼에도 ‘관세음32응신도’를 살펴보면 지난 회에 소개한 이상좌의 나한도와는 사뭇 다른 화풍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한도는 스케치풍으로 휘날려 그린 그림이고, ‘관세음32응신도’는 용도와 목적이 다른 그림임을 감안해야 한다. 특히 이상좌의 인생에서 중요한 계기였던 중종어진을 그릴 때에나 ‘공신전’ ‘열녀전’의 삽화를 그릴 때에는 매우 섬세한 필치가 요구되었을 터, 그의 섬세한 기량을 바로 이 ‘관세음32응신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관세음32응신도’의 관세음보살 세부.

‘관세음32응신도’는 기본적으로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다보부처님과 함께 설법하실 때에 무진의보살이 나와 관세음보살은 어떤 이유로 관세음보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묻자,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관세음보살에 대해 설명해주신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사람들이 불이나 물이나 도둑 등에 의해 해를 입게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나타나 도와주실 뿐 아니라,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모습이 필요할 때는 부처님의 모습으로, 벽지불이 필요할 때는 벽지불의 모습으로, 성문의 모습이 필요할 때는 성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등, 여러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실 수 있는데, 이때 언급된 다양한 모습이 모두 32가지여서 이를 ‘32응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림의 상단에는 ‘법화경'의 주요 장면인 석가모니부처님과 다보부처님이 나란히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앉아계시고, 그 좌우 주변에는 ‘법화경' 설법 당시 나투신 시방제불의 모습을 표현했다. 공중으로 표현된 이 상단은 부처님의 세계로, 반면 중생들의 세계는 산수화로 풀어내었다. 그런데 관음보살이 앉아계시는 산수의 윗부분은 기암괴석이 솟아있는 모습이 마치 조선시대 궁궐에서 임금의 뒤에 펼쳐두었던 일월오봉도를 보는 것 같다. 조선초기의 일월오봉도는 이런 화풍으로 펼쳐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자실 역시 궁정화가로서 궁궐에서 이런 그림들을 그려냈던 화가였을 것이다.

그 아래로는 관음보살의 다양한 응신을 나타냈는데, 이렇게 큰 화면에 한꺼번에 응신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은 아직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발견된 바 없다. 비록 이야기를 구성하는 부분적인 표현들은 중국의 ‘법화경'에 실린 삽화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존인 관음은 고려시대에 많이 그려진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차용으로 하고, 나머지는 ‘법화경' ‘보문품'의 삽화 그림들을 통합하여 이렇게 유기적으로 풀어놓은 것은 유례가 없는 시도였다. 나아가 산수와 불교회화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구도 역시 궁정에서 산수병풍을 그렸던 화가였기에 가능한 참신한 시도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이한 것은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묘사되어야 함에도 이 ‘관세음32응신도’의 주존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묘사되지 않은 점이다. 혹시 세속화가였기 때문에 불교도상을 잘 몰랐던 것일까? 그러나 경전의 내용을 도해한 실력을 보건데, 그 정도로 불교도상에 무지한 화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혹시 기존의 ‘화엄경' ‘입법계품'에 바탕을 둔 수월관음이나 혹은 아미타불의 협시로서의 관음보살과 구분하기 위해 법화경에 등장하는 관음보살을 의도적으로 화불을 생략함으로서 차별화하려고 했던 것일까. ‘법화경' ‘보문품' 속의 관음은 오롯이 다른 보살들과 부처님들로부터 찬탄을 받는 주인공으로서의 관음이기 때문에 화불을 모시지 않고 관음보살 단독으로 묘사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처럼 새로운 도상을 창안하고, 기존의 도상을 변화시키는 시도야말로 앞으로 현대의 불화가 나아가야할 길로 생각된다. 또한 전통 도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을 가미할 수 있었던 속세의 화가 이자실은 그 선구적인 사례라 하겠다.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21호 / 2020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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