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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양산 통도사와 환성 지안 스님

선과 교학으로 대중 교화, 한국불교 수행기풍 진작한 선지식

전국 두루 행각하며 교화 펼쳐 유생에게도 화엄사상 알려
역모 죄명 뒤집어 쓴 채 옥고…제주 도착 7일 만에 입적
전국 제자 3000여명 배출…통도사 불보사찰로 위상 높여

18세기 이후 통도사가 경상도를 대표하는 사찰로 위상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지안 스님의 문도인 환성문파 통도사 대중들이 사찰을 중수하고 수행 풍토를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다.

불교의 부활을 꿈꾸며 억불정책에 맞섰던 허응 보우(虛應 普雨1509?~1565) 스님이 제주도에서 입적하고 그 후로 100년, 쇠락일로를 걷던 조선 불교에 중흥의 기틀을 다질 뛰어난 선지식이 태어났다. 환성 지안(喚醒志安, 1664~1729) 스님이다. 지안 스님은 배불숭유의 완고한 사대부의 득세에도 교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행력으로 수많은 대중들을 감화시킨 스님이었다. 특히 당대 ‘화엄학’의 일인자로 꼽히던 스님은 일생을 강설과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말법의 시대, 위태롭게 사그라져가던 법의 등불을 다시 밝힌 지안 스님은 1644년(현종 5) 6월10일 강원도 춘천의 정(鄭)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미 영특하고 기상이 남달랐던 스님은 1678년(숙종4) 15세에 경기도 양평의 미지산 용문사에서 출가해 상봉 정원(霜峰淨源, 1627~1709)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상봉 스님은 편양파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65) 스님의 제자로서 학승의 교과서인 ‘도서(都序)’와 ‘절요(節要)’의 과문(科文)을 봉암사에서 지은 인물이다. 상봉 스님은 해인사에서 ‘열반경’ 등 경전에 현토를 달고 ‘화엄경’의 과목을 썼을 정도로 교학에 뛰어났다. 수계사 상봉 스님의 이러한 면모는 당시 갓 출가한 지안 스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안 스님은 17세 때 풍담의심 스님의 또 다른 제자이자 상봉 스님의 동문인 월담 설제(月潭雪霽, 1632~1704) 스님을 찾아갔다. 월담 스님은 한눈에 지안 스님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의발을 전수했고 지안 스님은 이후 경론 공부에 전념했다. 월담 스님은 금강산과 묘향산 등 각지의 사찰을 유력하면서 선을 닦고 교를 강설했는데 대교과의 ‘화엄경’과 ‘선문염송’에 특히 뛰어났다. 월담 스님은 만년에 전라도 징광사에 주석하며 호남에서 교화를 펴다가 입적했다. 선과 교의 쌍수를 추구하고 여러 지역을 행각한 지안 스님의 기풍과 이력은 스승인 월담 스님의 풍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지안 스님은 27세가 되던 1690년, 김천 직지사를 찾았다. 당시 직지사에는 ‘화엄경' 강의로 명성을 날리던 모운 진언(慕雲震言, 1622~1703)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법회를 개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간 것이다. 지안 스님의 자질을 간파한 진언 스님은 대중들에게 “나를 이을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에게 법을 들으라”고 하고 자신의 강석을 지안 스님에게 물려주고는 조용히 다른 곳으로 떠났다. 대중을 향한 지안 스님의 사자후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지안 스님의 언변은 강물처럼 부드럽고 폭포수 처럼 거침없었다. 스님의 법문을 들은 수백 명의 대중들은 스님의 설법에 크게 감화됐고 막혔던 의문도 시원하게 뚫림을 경험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지안 스님의 법문은 “머리 가르마 타듯 명쾌하고 넓고 밝음이 강과 하천을 구분하는 것과 같아서 대중들이 활연히 개오하게 되니 종풍이 크게 드날리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지안 스님의 회상(會上)으로 많은 스님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각지에서 스님을 초청하는 편지도 쇄도했다. 하지만 불법의 중흥만을 염원했던 지안 스님에게 명성과 권위는 안중에 없었다. 스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전법의 길에 나섰다.
 

환성 지안 스님 진영.

지안 스님은 일생 동안 전국의 산사를 두루 행각하며 교화를 폈다. 언제나 평탄한 길보다는 험난한 길을 먼저 선택했던 스님은 무너지는 담장과 썩은 서까래라도 비만 가릴 수 있는 곳이면 머물렀다. 규모와 상관없이 스님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스님은 영남과 호남은 물론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함경도 등 전국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스님의 이러한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불교도들이 감복했다. 끊이지 않는 정쟁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방황하던 유생들도 스님에게서 ‘화엄학’을 공부하며 삶의 길을 모색했다. 이들에게 지안 스님은 희망이었다. 무너져 가던 불법이 다시 일어섰다. 핍박과 가난으로 삶의 희망을 잃었단 많은 백성들이 스님을 따랐다.

1725년(영조1) 김제 금산사에서 열린 화엄대법회에는 1400여명의 대중이 몰려들었다. 스님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과 존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이 법을 설하면 대중들은 모두 존경과 찬탄으로 스님을 우러러 봤다. 지안 스님의 이런 놀라운 법석들이 거듭되자 사대부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불교가 그리고 스님이 민초들의 희망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당파싸움으로 이골이 난 사대부들의 수완은 놀라웠다. 영조 임금 당시 국정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중심이 돼 일으킨 이인좌의 난(1728년)에 교묘하게 스님을 엮어 넣었다. 정권을 잡았던 노론세력의 집요한 모함으로 1729년(영조 5), 지안 스님은 결국 역모라는 무서운 죄명을 뒤집어쓰고 전라감영에 유폐됐다. 스님의 결백함은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그러나 이들은 스님을 가만두지 않았다. 온갖 구실을 붙여 끝끝내 스님을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조선 중후기 외로이 전등의 불씨를 살렸던 스님은 모진 고초를 겪다가 제주 도착 7일 만에 가부좌를 한 채 입적에 들었다. 법랍 51년, 세납 66세였다. 그러나 제주도 유배 이후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은 허응당 보우 스님처럼 사대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분석들이 많다.

스님이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는 임종게를 남겼는데 당시 제주도에는 3일 동안 폭우가 그치지 않았다고 전한다.

스님이 적멸에 들었으나, 사대부들의 무서운 눈초리에 누구 하나 스님의 비문을 쓰지 못했다. 결국 스님의 비문은 입적 이후 33년이 지난 1762년이 돼서야 작성됐다. 비문을 지은 이조판서 홍계희(1703~1771)는 비문 끝에 “훌륭한 대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배 보내 입적케 한 일은 조선의 비극임을 극렬히 통탄한다”고 애석해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안 스님의 비는 문손 연담 유일 스님에 의해 대둔사(현 해남 대흥사)에 세워졌다.

지안 스님의 문도는 18세기 이후 급 성장했다. 뛰어난 스승 밑에서 또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배출돼 조선 후기 불교를 일으켰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스님의 문도는 전국으로 3000여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특히 양산 통도사의 경우 지안 스님 문도인 환성문파는 18~19세기에 통도사 중창의 주역이었다. 18세기 이후 통도사가 경상도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하고 불보사찰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환성문파 통도사 대중들이 힘을 모아 사찰을 중수하고 수행 풍토를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통도사 백련암 누각에 300년 가까이 걸려있던 현판 전면에는 ‘근차판상운'이라는 제목의 지안 스님의 시 두 편이 음각돼 있다.

통도사에는 지금도 지안 스님의 유품이 전해오는데, 소나무겨우살이인 송라를 촘촘히 엮어 만든 모자인 송낙(松絡)이 유명하다. 조선 후기 학자 조임도(趙任道, 1585~1664)의 ‘유관록(遊觀錄)’을 통해 통도사 소장 송낙은 지안 스님이 말년에 썼던 모자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유품으로 백련암 누각에 300년 가까이 걸려있었던 현판이다.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현판 전면에는 ‘謹次板上韻(근차판상운)’이라는 제목의 지안 스님 시 두 편이 음각돼 있다.

지안 스님과 관련한 문헌기록에서는 통도사가 직접 연결된 지점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후대에 쓰여진 ‘통도사백련정사만일승회기’(1875)에 “환성 조사가 이곳에 주석하고 호암대사가 뒤를 이어 여러 강백들이 계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아 지안 스님이 백련암을 중수하고 통도사에 주석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통도사와 지안 스님의 깊은 인연은 최근 통도사가 지안 스님의 깊은 연고를 새롭게 발견하고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함에 따라 스님의 삶과 사상,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위법망구 정신이 조금씩 세간에 드러나고 있다. 바람 앞에 등불 갔던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탄압에도 오로지 부처님 법을 품고 중생을 어루만졌던 지안 스님이 있었기에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밝고 환한 정법의 빛이 온 누리에 흘러넘치고 있음이리라.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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