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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살(Bodhisattva)

기자명 현진 스님

“연등불수기 설화에서 처음으로 ‘보살’ 언급”

보살은 보디‧사트바의 복합어
‘금강경’에서 사용되는 보살은
이미 깨달았거나 깨닫기 위해
정진하는 중생의 두 의미 담겨

‘보살’이란 용어가 대승불교의 전반에 걸친 주요개념 가운데 하나임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금강경’에서도 “보살은 그 마음을 이렇게 항복시켜야만 하느니라”라는 등등의 글귀를 통해 수행의 주체로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까닭에 보살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 일괄해보는 것도 ‘금강경’의 이해에 도움이 될 듯싶다.

‘보살’이란 용어의 사용은 꼭 대승불교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 이전부터 사용되지도 않았으니, 윤회(輪廻)나 불타(佛陀) 등의 용어들과는 달리 불교에서만 사용된 독자적 용어인 것만은 사실이다. 보살은 이미 빠알리어로 된 4부 ‘니까야’ 전체에 사용되었었고, 그것의 한역인 ‘아함경’ 가운데도 ‘장아함경’과 ‘증일아함경’에는 많이 등장하는 용어이다. 다만 ‘중아함경’에는 볼 수 없고 ‘잡아함경’에는 후대에 삽입된 내용에만 조금 보이는 까닭은 이 두 아함경이 부파불교의 한 부파로서 보살이라는 말을 꺼렸던 것으로 추측되는 유부(有部)에 의해 전승된 원본에서 번역된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비록 니까야 전체에서 보이는 용어일지라도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보살의 개념이 특히 강조되고 그 내용이 풍성해진 것은 대승불교에 이르러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보살이라는 개념은 최소 서력기원전 2세기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말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연등불수기(燃燈佛受記)의 설화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살은 산스끄리뜨어 보디삿뜨와(bodhisattva)를 소리옮긴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이다. bodhi(깨달음)와 sattva(중생)의 복합어인데, 복합어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① 깨달은 중생-비록 중생의 상태이지만 실제는 이미 깨달음을 갖춘 경우이니, 문수와 보현 등의 대승보살들이 그 예이다. ② 깨닫고자 하는 중생-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중생이란 의미이니, 넓은 의미에서 모든 중생들을 가리킨다.

구마라집의 구역에서 중생(衆生)으로 번역되고 현장의 신역에선 유정(有情)으로 번역된 ‘sattva’는 불교 이전부터 사용되었으며 브라만교적인 색채가 짙게 남아있는 용어이다. 브라만교에서 그들이 절대존재라 여기는 브라흐만(brahman)과 합일되지 못한 채, 즉 해탈하지 못하고 남아서 존재하는(sat) 상태(tva)

를 ‘sattva’라고 중생이라 일컬었다. 해탈하지 못한 모든 존재는 중생인 셈이다. 불교 또한 해탈의 개념을 도입하며 자연스럽게 중생이란 용어도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개념이 정립되며 단지 언어의 해석방식에 의한 구분을 넘어 몇 가지로 세분되었다. 가장 좁은 의미의 보살로부터 범위를 넓혀 가면 다음과 같다. ① 보처보살(補處菩薩)-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태어나면 불도를 성취하여 부처님이 될 분을 가리키는 말. 보처보살의 거처는 도솔천이 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곳에서 하생하여 마야부인의 태에 들었으며, 지금은 미륵보살이 계시다고 한다. ② 수기보살(受記菩薩)-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연등불로부터 미래세에 성불하여 석가모니란 명호의 부처님이 될 것이란 수기를 받았는데, 이를 기점으로 그 이후엔 보살이라 일컫게 되는 경우이다. ③ 32상(相)보살- 수기를 받은 후에 3아승기겁의 수행을 완료한 후에도 100겁 동안 32상을 얻는 업을 닦아야만 보살이라 일컬을 수 있다고 ‘발지론’과 ‘대비바사론’ 등에 언급되어 있다. ④ 본생보살(本生菩薩)- 이미 수기를 받은 이후라면 그 사람의 수기를 받기 이전 생을 언급할 때도 모두 보살이라 일컫는 경우로서, 부처님의 전생이야기인 ‘본생경’이 이에 해당한다. ⑤ 중생보살(衆生菩薩)-모든 중생들은 어차피 모두 수기를 받고 성불할 인연을 지니고 있기에 보살이라 일컫는 경우인데, 흔히 불자를 달리 보살이라 부르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그 예이다.

‘금강경’에서 언급된 ‘보살’은 크게 ‘이미 깨달음을 갖춘 중생’과 ‘깨닫기 위해 정진하는 중생’의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그냥 ‘보살’로 뭉뚱그려 읽은 것이 아니라 해석되고 구분된 두 의미를 유념해서 ‘금강경’을 읽으면 가려졌던 ‘금강경’이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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