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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야사를 교화하다

“고뇌하는 젊은이에 최적의 답 제시”

기녀와 놀며 쾌락에 빠진 야사
잠든 기녀들 시체 더미로 보여
충격에 빠진 뒤 괴로움 자각해
붓다, 도덕적 삶 설해 바른길로

35세에 정각을 성취해 붓다가 된 고따마는 바라나시(Bārāṇasī, 까시국의 수도)에서 첫 교화를 시작했다. 붓다는 다섯 수행자를 이시빠따나(Isipatana)에 있는 미가다야(Migadāya, 녹야원)에서 교화하고 얼마 안 되어 야사라고 하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야사는 불교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바라나시에 사는 부호의 아들이었다. 엄청난 부를 지닌 야사의 아버지는 그를 위해 궁전에 버금가는 겨울용, 여름용, 우기용의 전각을 지어주었다. 야사가 붓다를 만나게 되는 때는 마침 우기(雨期)였다. 야사가 살던 곳은 미가다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던 것 같다. 붓다는 그곳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 수행자를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첫 교화에 매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고 그리고 우기를 맞이한 것 같다.

야사는 우기용 전각에서 4개월 간 기녀들과 함께 춤과 음악, 욕망에 사로잡혀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깬 야사는 여기저기에서 널부러져 자고 있는 기녀들을 보고 마치 시체 더미를 본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 길로 집을 나서 “오! 괴롭다. 오! 고통이다”를 외치며 숲으로 들어갔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꿀만한 기회가 주어진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몇 번의 기회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야사에게 어느 날 새벽의 경험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회가 찾아오더라도 기연(機緣)이 없으면 기회가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된다.

붓다의 경우도 야사와의 만남은 큰 의미를 갖는다. 야사는 까시국 수도 바라나시에서도 대표적인 장자(거상)의 아들이었다. 야사의 출가는 바라나시 부호 아들들의 연이은 출가로 이어지게 된다. 이 일로 불과 수개월 만에 붓다는 60명의 출가 제자를 두게 되고 재가신자 그룹도 만들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붓다는 어떻게 야사를 교화했을까? 야사는 붓다를 만나기 전, 수행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내면에 욕망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실증이나 깨달음과 같은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그는 욕망에 둘러싸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잠자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시체 더미를 보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고 현실을 드디어 ‘괴로움’으로 자각하게 된다. 붓다는 바로 이 순간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괴로움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그대로 두면 결국 늪에 빠져 죽게 된다. 삶이 송두리째 망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 때 붓다와 같은 눈 밝은 스승을 만나게 되면 그의 삶은 전혀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다. 붓다는 괴로움에 울부짖는 야사에게 말을 건다.

“야사여! 여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여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야사여! 와서 앉으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그에 대해 알려주겠습니다.”(Vin I p.15)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자 구원자이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괴로움이 없고 고통이 없는 곳’을 말해주겠다고 하니 누가 그 말을 듣지 않으려 할까.

붓다는 야사에게 가장 먼저 차제설법을 통해 인과의 이치를 알려주었다. 차제설법이란 “베풀고(布施), 도덕적 삶을 살면(持戒), 하늘나라에 태어난다(生天)는 가르침”이다. 야사가 이를 통해 바로 인과의 이치를 깨닫자 붓다는 괴로움을 바로 보고 해결할 수 있는 사성제를 가르쳤다. 이후 야사를 찾으러 온 야사의 아버지에게 붓다가 설법하는 동안 야사는 궁극적 깨달음을 얻게 된다. ‘상윳따니까야’ 1권, ‘악마의 품’에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이 전한다.

“괴로움과 그 원인을 본 사람이 어떻게 감각적 쾌락에 빠지겠는가.”

이 경전의 말씀처럼 야사의 이야기를 전하는 율장에서도 야사가 ‘이제는 감각적 쾌락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아시고’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야사는 출가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야사의 예에서 우리는 붓다가 보여주는 교화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상대가 갖고 있는 문제에 따라 그에 맞는 처방을 주는 것이다. 즉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교화행에 일관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이다.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nikaya@naver.com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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