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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불교는 인간학이다

기자명 마성 스님

“대장경은 인류정신 문화의 보배로운 창고”

대장경엔 정치와 경제·사회·문화·직업 등 인간 생활 망라
붓다 전체 가르침은 인간의 자기 형성의 길 제시하고 있어
불완전한 인간서 완전한 인간으로 가는 노정 밝힌 텍스트

스리랑카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워에 있는 석경, 큰 바위 표면에 경전을 새겨 놓았다.
스리랑카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워에 있는 석경, 큰 바위 표면에 경전을 새겨 놓았다.

현존하는 대장경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심리·가정·직업·풍속·습관은 물론 우화와 설화 등 무수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인간 생활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다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대장경은 인류정신문화의 보배 창고가 아닐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에 관한 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불교는 처음부터 무신론에 토대를 둔 인간을 위한 ‘인간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전체 가르침은 인간의 자기 형성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이상적 인간상인 아라한이 되는 길을 제시한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을 증득하는데 있다. 그 열반을 증득한 사람을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한다. 아라한이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을 다 해 마친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누구나 지금·여기에서 아라한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금생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열심히 수행 정진한 결과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잡아함경' 제1경 무상경(無常經)에 “비구들이여,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比丘! 心解脫者, 若欲自證, 則能自證: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이에 대응하는 ‘니까야’에서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a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m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이것은 스스로 아라한이 되었음을 선언한 정형구이다. 모든 출가자들이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처음 니까야나 아가마(阿含)를 접한 사람들은 그것을 읽다가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한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말씀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또 붓다의 말씀은 주로 문답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핵심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자세히 읽다보면 잡다한 내용이 의외로 논리정연하게 하나의 원리로 설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원리란 바로 붓다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진리임은 말할 나위 없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 즉 자내증(自內證)의 진리가 바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라고 선언했다. 즉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가 그것이다.

이 사성제가 바로 인간학인 것이다. 붓다는 이 사성제의 원리를 깨달음으로써 ‘붓다(覺者)’라 불릴 수 있는 자각을 얻었으며, 이것을 교법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른바 고(苦, dukkha)·집(集, samudaya)·멸(滅, nirodha)·도(道, magga)라는 표면상 극히 간단한 가르침이다. 즉 이 세계는 괴로움이고,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渴愛, taṇhā)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소멸하려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支聖道)’를 닦아 갈애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사성제의 법문은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세계, 즉 사실세계와 이상세계에 대한 법칙을 밝힌 것이다. 즉 고·집의 계열은 윤회계의 인과를 명확히 밝힌 것이고, 멸·도의 계열은 해탈계의 인과를 명확히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두 세계의 결합은 드디어 존재와 당위 전체를 모두 포섭하는 범주가 된다. 또 사성제의 교설은 범부에서 성자가 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즉 고·집의 계열은 범부의 세계이고, 멸·도의 계열은 성자의 세계이다.

이와 같이 붓다의 최초 설법으로 알려져 있는 사성제는 불교의 근본 교설일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가는 노정을 밝혀 놓은 텍스트이다. 그래서 붓다는 사성제를 모르는 것을 무명(無明, avijjā)이라고 했다. 즉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여 긴 세월을 그렇고 그런 태어남으로 윤회하여 왔도다. 이제 이것을 보아 새로운 존재로의 이끌림을 근절하였도다. 괴로움의 뿌리를 잘라버렸도다. 이제 다시 태어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SN.Ⅴ.432) 이처럼 사성제를 모른다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과 소멸에 대한 원리를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붓다는 ‘전도선언’에서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여러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N.Ⅰ.105)고 했다. 비록 이 경에서 붓다는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고 했지만, 그 가르침의 핵심은 현세의 인간을 위한 것이다. 초기경전에 천상에 관한 가르침(生天論)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생전에 보시와 지계의 공덕을 많이 쌓아야만 사후에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가장 초보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신들도 지은 바 공덕이 다하면 괴로움이 가득한 지옥에 태어나기도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내세의 존재 여부는 현재의 삶에서 증명할 수 없다. 붓다는 지나간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가르침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면 내세의 생천은 보장된다. 굳이 사후 생천을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지금·여기에서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윤회를 종식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붓다의 주된 관심사는 현실의 인간에 관한 것이다. 그는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법을 설했다. 만일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한다면 현실에서 지혜(paññā)를 발휘하게 될 것이고, 그 지혜가 다른 인간관계에서는 자비(mettā)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지혜와 자비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 완성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한마디로 불교는 인간학이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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