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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신사임당의 ‘수박과 들쥐’

기자명 손태호

“청춘의 꼿꼿한 기상으로 모든 일 잘 되기를”

색채 곱고 아름다운 초충도 대표화가 신사임당의 작품
수박씨는 자손·덩굴은 만대로 하여 자손만대 번창 의미
쥐는 ‘천수경’서 만월보살 화신…부지런함·성실함 상징

신사임당 作 초충도 8곡 병풍 中 제1폭 ‘수박과 들쥐’, 종이에 채색, 28.3×34cm, 16세기 초, 국립중앙박물관.
신사임당 作 초충도 8곡 병풍 中 제1폭 ‘수박과 들쥐’, 종이에 채색, 28.3×34cm, 16세기 초, 국립중앙박물관.

경자년(庚子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곧 설도 다가오니 진짜 새해의 시작입니다. 새해가 되면 항상 올해는 무슨 동물의 해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경자년이니 올해는 12간지 중 첫 번째 쥐띠 해입니다. 쥐띠 해이니 쥐 그림 한 점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신사임당의 ‘수박과 들쥐'입니다. 이 그림은 신사임당의 ‘초충도 8곡 병풍’ 중 제1폭에 있는 그림으로 색감, 구성, 묘사가 모두 훌륭한 작품입니다.

‘초충도(草蟲圖)’는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말합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풀과 벌레만으로 구성된 예는 드물고 대개 채소·과일·꽃·새와 함께 그려지므로 영모화(翎毛畵)·소과화(蔬果畵)·화훼화(花卉畵)의 범주에서 이해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초충도’하면 대표적인 화가가 신사임당입니다. 신사임당은 잘 알다시피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신사임당을 이야기 할 때 율곡의 어머니로만 이야기해선 안 됩니다. 신사임당은 그 자체로 위대한 화가이자 예술가이기에 누구의 어머니와 아내로만 이해하면 신사임당의 예술적 가치가 빛을 바랩니다. 신사임당은 문장과 글씨도 훌륭하지만 가장 뛰어난 재능은 역시 그림입니다.

커다란 수박 두 개가 바닥에 있는데 가운데 큰 수박 아래가 커다란 구멍이 나서 빨간 속살이 다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수박이 입을 벌린 채 ‘와하하’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쥐 두 마리가 수박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수박의 빨간 속살이 드러났습니다. 나비도 수박 냄새를 맡고 날아듭니다. 그 옆에는 빨갛게 핀 패랭이꽃이 있습니다. 수박 줄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쭉 휘어져 있습니다. 여성인 신사임당 특유의 색채가 곱게 나타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수박에 일단 주목해 보면 우선 서양화라면 빛을 많이 받는 수박 꼭지 부분을 밝게 그리고 아랫부분을 진하게 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임당은 수박 본래의 모습 그대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표피가 베껴져 있는 모습, 줄기에 또 다른 가는 줄기가 감고 있는 모습 등 수박을 제대로 관찰하고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초충도’는 섬세한 관찰이 필수적 요건입니다. 수박은 수복(壽福)으로도 읽는데 씨가 많은 것은 자손을, 덩굴은 만대(蔓帶)라 하여 만대(萬代)와 발음이 같으니 자손만대 번창하라는 뜻을 품고 있는 과일입니다. 왼쪽 아래에서 올라와 중앙을 가로질러 우측으로 휘어져 있는 수박 줄기를 보십시오. 이런 모양의 줄기 표현은 마치 등 긁는 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즉, 여의(如意)라 하여 ‘뜻대로 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른쪽 패랭이꽃을 보십시오. 패랭이꽃은 한자로 석죽화(石竹花)라고 하며 꼿꼿하게 서있는 모습에서 ‘청춘’을 상징합니다. 신사임당도 청춘의 기상처럼 꼿꼿하게 그렸습니다. 하늘거리는 나비가 보이시나요? 나비는 조선 화가의 주요 소재입니다. 나비 ‘접(蝶)’자는 80을 상징하는 노인 질(耋)과 중국식 발음이 같다고 합니다. ‘띠에’ 라고 발음하지요. 따라서 우리 옛 그림에 나비가 나오면 일단 장수를 비는 의미라고 생각하시면 대부분 맞습니다. 두 마리의 나비가 있군요. 나비의 모습으로 보면 종류는 다른 종입니다. 색깔로 보니 암, 수 한 쌍을 구분한 것 같습니다. 새색시 붉은 뺨처럼 붉게 그린 나비는 암컷이고, 검은 갓을 쓴 하얀 얼굴의 선비처럼 날개 위는 검게 아래는 흰색으로 그린 나비는 수컷으로 보입니다.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들쥐가 두 마리 있습니다. 원래 쥐는 새끼를 많이 낳아 금방 늘어나므로 우리 옛 그림에서는 재물과 넉넉함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처럼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나오는 경우는 재물보다 낮과 밤이 번갈아 가는, 즉 세월이 흘러가는 걸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징으로 쥐를 표현한 이야기가 우리 불교 경전에도 나옵니다.

‘아함경’에도 같은 의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들판을 걷다가 사나운 코끼리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는 도망치다가 마른 우물 속으로 몸을 피하게 됩니다. 마침 덩굴이 있어 덩굴을 잡고 밑으로 내려가니 바닥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덩굴로 오르려 위를 쳐다보니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덩굴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덩굴이 끊어지면 그는 죽은 목숨입니다. 그렇게 위급한 순간에 나무에서 뭔가 떨어졌는데 입속에 들어와 맛을 보니 달콤한 꿀이었습니다. 그는 위험한 순간을 잊고 떨어지는 꿀맛을 받아먹는데 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의 헛된 즐거움에 빠져 자신이 얼마나 위험해 빠져있는지 모르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때도 흰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세월을 의미합니다. 쥐가 수박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쥐가 이 수박을 다 먹으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요? 그래도 언젠가는 수박을 다 먹어치울 것입니다.

그림 속 여러 상징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아직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들이 청춘의 꼿꼿한 기상을 가지고 팔십 노인이 될 때까지 부부가 해로하며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이 잘 되길 바란다. ‘수박과 들쥐’는 그냥 단순한 식물, 곤충, 동물들의 조합이 아니라 이렇게 깊은 애정과 축원이 담겨 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아마 신사임당이 아들 내외나 딸과 사위를 생각하며 그렸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오는 그림. 정말 사랑스런 그림이지 않습니까?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12가지 명호 역시 각각의 동물로 배치되는데 쥐는 만월보살(滿月菩薩)의 화신으로 나옵니다. 만월보살은 달에 광명의 물을 채우는 신인데 악마가 그 물을 계속 먹어치우는 바람에 그를 잡기 위해 쥐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고 합니다. 악마를 무찌르는 동시에 계속 광명의 물을 채우기 때문에 그의 몸은 항상 고달프고 바쁘지만 그는 그 부지런함으로 인해 12지 동물의 첫 번째가 되어 부지런히 중생들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결국 쥐는 모든 부지런하고 성실한 우리 서민의 보호자입니다.

경기가 어려워지거나 좋아지거나 상관없이 우리 서민들의 삶은 늘 고달프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서민들의 월급은 늘 쥐꼬리 같고, 주머니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쥐뿔도 없다’ 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쥐의 해인 올해만큼은 우리 아버지들 쥐꼬리월급 봉투가 좀 더 두툼해졌으면 좋겠고 쥐의 부지런함으로 곳간은 좀 더 넉넉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다보니 쥐구멍에 볕들 날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런 경자년이 되길 만월보살님께 기원 드립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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