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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승담마야나 선원장 아신 빤딧짜 스님

“마음이 부자인 삶을 살고 싶나요? 그럼 수행을 하세요”

위빠사나는 무상·고·무아를 알아내는 지혜로서 불교의 핵심
팔선정·신통지 체득한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수행
스스로의 마음 성장시키고 행복에 이르는 탁월한 수행법

아신 빤딧짜 스님은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리변화를 알아차려 인간내면을 성장시키는 데도 탁월하다”고 강조했다. 
아신 빤딧짜 스님은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리변화를 알아차려 인간내면을 성장시키는 데도 탁월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여의시어 온갖 공양과 예경 받으실만한 분이자, 사성제 진리를 비롯한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존귀하신 부처님께 절합니다.”

이 예경문은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예경문은 길이는 짧지만,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예경을 했던 내용으로 그 속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표현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확실하게 새기면서 예경을 올리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아무에게나 부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예경문에서는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여의시어 온갖 공양과 예경을 받으실만한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처님 여래 10호 중 첫 번째 단어에 담긴 의미입니다. 또 정각자, 올바르게 깨달은 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바르게 깨달은 자 중에서도, 누가 가르쳐서 깨달은 자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번뇌가 없기에 최고로 청정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청정하시기에 온갖 공양을 받을 만하신 분입니다. 공덕에는 원인 공덕과 결과 공덕이 있습니다. 원인 공덕은 모든 번뇌를 다 씻어내어 깨끗하고 청정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결과 공덕은 온 세상의 공양을 올려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법문에 앞서 여러분은 위빠사나 수행을 간단히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예경을 올렸습니다. 위빠사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17년 전 인연이 닿아 한국에 올 당시만 하더라도, 위빠사나는 마치 불교가 아닌 외도들이 하는 수행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위빠사나에 대해 관심을 가진 스님과 불자님들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타종교인도 위빠사나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기며 불교를 배우고 수행법을 체험하고자 문의하는 사례도 많습니다. 대승불교인 한국에서 이 같은 분위기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발전을 위해 매우 의미 있는 현상입니다. 

위빠사나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위빠사나는 불교의 핵심입니다. 왜 위빠사나가 불교의 핵심일까요? 위빠사나를 빼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셔도 되기 때문입니다. 팔선정(八禪定), 신통지(神通智)까지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아도 다 알려진 법이었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싯다르타 태자는 29살에 출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35살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6년 동안 수행을 하셨습니다. 그 6년이 사실은 참회수행과 고행이었습니다. 6년 고행 동안은 과보를 받는 기간이었습니다. 

지금의 수행자들도 고집을 피우고 억지를 부립니다. 상기 병까지 걸려도 고행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6년이 올바른 수행의 길이 아니라 고행의 길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말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초전법륜경’에서 직접 설하신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행은 고통뿐이며 고행은 성인들의 수행법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진정으로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되기 위해 집중하여 수행한 시간은 단 15일이었습니다. 6년 고행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실 때, 옆에서 시봉을 하던 다섯 명의 비구는 실망하며 모두 부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떠난 뒤 비로소 혼자 조용히 수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부처님께서는 이미 고행을 하시기 전 팔선정을 끝내셨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는 부처님께서만 설하신 법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위빠사나는 무상, 고, 무아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물질과 정신밖에 없다’고 하면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진실입니다. 그 물질과 정신은 인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만 과정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현대의 과학으로 모두 검증되어 있습니다. 나, 너, 아상, 인상, 중생상은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냐면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매 순간 변화하고, 매 순간 사라지고, 매 순간 무너지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일회용은 가치 없다는 말입니다. 한 번 쓰면 쓰레기가 됩니다. 물질과 정신, 매 순간 원인에 따라 생긴 것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이 같은 진실은 종교와 관계없이 생물학, 의학계, 심리학계에서도 알고 있으며 요즘 시대의 유명한 대학에서 나온 연구결과들도 무척 많습니다. 학계뿐만 아니라 요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도 모두 수행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 “이 세상은 모두 물질적인 사실과 정신적인 사실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상하고 무상하기에 가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 몸이 아프다, 경제가 불안하다, 이러한 것은 가치가 없기에 의지할만한 것이 아니며, 매 순간 무너지고 망가지고 상하기 때문에 ‘고’라고 합니다. 무상한 것은 의지할 것이 아닙니다.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믿을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무상하기에 무아라고 합니다. 무상을 알아야 무아를 압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위빠사나는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입니다. 문법적으로 위빠사나는 명사이고, 위빠사띠는 동사입니다. 위빠사띠라는 단어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삼장법에 셀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위빠사띠를 분석해보면, 위는 여러 가지라는 의미이며, 빠사띠는 관찰하다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는 무상이 25가지, 고가 10가지, 무아가 5가지입니다. 그 40가지에 오온을 곱하면, 200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눌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상, 고, 무아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무엇이든지 무상, 고, 무아라고 아는 지혜가 위빠사나입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구나,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알 때마다 위빠사나의 지혜가 생깁니다. 

불교의 핵심이 위빠사나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수행법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팔선정까지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도 다 세상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신통지를 갖춘 수행자도 세상에 많았지만, 그것과 깨달음은 별개입니다. 팔선정을 닦아도, 신통지를 갖고 있어도 번뇌는 없애지 못했습니다. 데와닷타는 선정과 신통지가 뛰어났지만, 번뇌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처럼 선정의 길과 깨달음의 길은 따로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행을 닦기 전 이미 팔선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번뇌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를 부처님께서는 세존으로서 깨달으셨습니다. 모든 번뇌를 다 여의시었습니다. 

그렇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지혜 계발’ ‘심리 변화’ ‘인간 성장’의 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먼저 지혜 계발의 수행입니다. 지혜가 계발되면 심리가 변화됩니다. 심리 변화는 좋게 변화하는 것을 말하고 성장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마음, 어릴 때 마음, 스무 살 때 마음이 다 다릅니다. 철이 들었다, 안 들었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 위치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할 때마다 변화를 알아차리는 지혜가 있습니다. 변화하기 전에는 없었던 지혜가 변화 이후 생깁니다. 마음도 변화하고 생각도 변화하고 행동도 변화하고 삶도 변화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멈추어 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나의 심리 성장이 멈춘 듯한, 몇 십 년 동안 마음이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성장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몸의 성장도 있고 정신적 성장도 있습니다. 정신적, 심리적 성장 없는 성장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인류의 시작을 발견하고자 과학자들이 애를 씁니다. 과학과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성장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성장이라는 단어도 사전에서 찾아보면, 더 커지고, 더 좋아지고, 더 강해지고, 뭔가 더 발전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구석기 시대와 비교하면 현대 과학은 무척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심리적으로는 얼마나 성장했을까요? 돌을 사용해서 살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이 시대 사람 중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 만족하며 살까요? 사실 사람은 죽었으면 죽었지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진정한 성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어왔던 길이 진정한 성장이었다면 아주 만족하겠지요. 잘 살 때도 있고 못살 때도 있습니다. 물리적 성장이라는 것은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언젠가는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발전을 거듭해도 우리의 마음은 항상 가난합니다. 마음 부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이 왜 필요한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 세상에 왔을까, 인간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다른 성장은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금 100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60세가 되면 잔치를 했는데 지금은 60세면 젊은 나이입니다. 의학이 계속 발전하면서 수명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성장을 거듭했지만, 과연 얼마나 성장한 것일까요?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행복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뛰다 보니까 제자리라고들 말합니다. 진정한 성장을 모르면 고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간 성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진정한 인간 성장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 계발과 심리 변화와 인간 성장의 길이라는 점을 거듭 말씀드리면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1월11일 부산 내원정사 템플스테이생활관에서 봉행된 전국교사불자연합회 겨울 수련회에서 아신 빤딧짜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23호 / 2020년 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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