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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장. ‘한 물건’과 ‘이심전심’

기자명 선응 스님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 만물의 본체

교법, ‘한 물건’을 셋으로 표현
선법에선 분별없는 둘 아닌 법
제자 지도하는 공안으로 전해
불립문자로 가르치기에 특별

4장의 본문은 “굳이 여러 가지 이름과 글자로 혹은 마음 혹은 부처 혹은 중생이라고 하지만 이름 따라서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당체가 바로 이것이다.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이다. 이 내용은 ‘60권 화엄경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에서 “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이 여러 가지 색수상행식(몸과 마음의 작용)을 그려낸다.…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한 것이다. 

‘황벽(?~850)선사의 ‘전심법요’에서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이 오직 이 하나의 마음이니 다시 다른 법이 없다. 이 마음은 아주 먼 과거로부터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한 적도 없으며(중략)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과 이름과 언어와 자취와 상대를 뛰어넘어 벗어나 있다. 당장 그대로가 바로 이것이니, 생각을 일으키면 곧 어기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마음이 곧 부처이니 다시 다른 부처님과 마음이 없다. 마음이 밝고 청정해서 마치 허공과 같아 한 점의 모양도 없는 것과 같으니 마음을 들어 생각을 움직이면 곧 법체를 어기니 곧 상에 집착하게 된다”라고 한 내용이다. 

이것은 ‘한 마음’에서 ‘진여’의 ‘부처’와 ‘생멸’의 ‘중생’이 갖추어져 있으니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 본래 부처며 만물의 본체이다. 서산대사가 해석하길, “‘한 물건’에 굳이 세 가지로 이름하고 글로 가르치는 것은 불법의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름을 집착해서 분별하지 말라’는 것은 선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한번 들고 한번 내리며, 문득 세우고, 문득 파하는 것은 모두 ‘법왕(부처와 조사)’의 법과 가르침이 자재한 것이니 이것은 위(당체, 본분)를 맺고 아래(방편, 교화)를 일으키는 것이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과 본체가 유독 특별한 것을 논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 물건’을 부처와 마음과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교법이다. 선법에서는 분별이 없는 ‘둘이 아닌 법’이고 ‘불립문자’이다. ‘한 물건’은 선가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공안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산어록’ 중 양개선사(807~869)와 태수좌의 문답에서,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꼬리도 이름도 성도 없지만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한다. 태양같이 밝은가 하면 칠흑같이 어둡다.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있지만 움직임에 속하지 않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며, 함허기화(1376~1431)는 ‘금강경오가해서’에서 “‘한 물건’은 ‘○’이다. 이름의 모양이 끊어졌지만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한 티끌이 동서남북상하에 두루 한다. 안으로 많은 묘를 포함하고 밖으로 많은 근기에 응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주인이며 만법의 왕이니 탕탕하기를 비교할 수 없고 가장 높아서 위가 없는 왕이고 세력 있는 주인이다”고 한 것과 같이, 불조께서 ‘진여’를 깨닫고 조사 공안의 가르침으로 제자를 지도해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법왕’이라고 한다. 

‘육조단경’에서는 “선지식들아. 법에는 문득 깨침과 점차 깨침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곧 닦는다.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본래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한다”고 한 것과 같다. 또한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으로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라고 한 것은 ‘금강경’에서 설한 ‘주함이 없는 금강심’과 ‘3공의 지혜’이다. 선법에서는 일체의 개념을 떠나서 둘이 아닌 본체를 밝히기 위해서 ‘한 물건’으로 화두를 제시하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당체에서 ‘문자를 세우지 않는 법’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특별하다. 게송하시기를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만남이요 타향에서 친구를 만남이로다”라고 했다. 이 게송은 송대의 홍매(1123∼1202)가 지은 ‘용재수필’에서 자신의 4구시 뜻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준 것에 대한 기쁨을 묘사했던 시다. 조사가 ‘이심전심’의 제자를 만났을 때의 기쁜 심정을 말한다.

선응 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 sarvajna@naver.com

 

[1523호 / 2020년 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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