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㊴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⑱
69.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㊴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⑱
  • 최병헌 교수
  • 승인 2020.02.04 10:20
  • 호수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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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 의해 정립된 신라 불국토설과 진종설, 국가위기서 민심 집결

불교치국책과 사리탑 건립…중국 수문제의 영향을 받아
황룡사 9층탑 포함 신라호국 3보설도 자장에 의해 정립
유교가 국가운영원리로 채택되면서 변방서 비참한 말년
자장 스님은 10곳에 탑과 절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원도 정선에 있는 태백산 정암사도 그중 한 곳이다. 사진은 정암사 전경.
자장 스님은 10곳에 탑과 절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원도 정선에 있는 태백산 정암사도 그중 한 곳이다. 사진은 정암사 전경.

자장은 최고귀족인 진골출신으로 25세에 벼슬길에 나오라는 왕명을 거부하고 출가하였다. 선덕여왕 7년(638) 당에 유학을 떠나서 장안과 종남산을 오가며 다양한 스승을 찾아보았다. 선덕여왕 12년(643) 대내외의 국가적 위기상황에 처한 본국의 소환 명령에 따라 귀국한 그는 새로 창건된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섭대승론’을 강의하고, 뒤에는 황룡사의 사주(寺主)가 되어 ‘보살계본’을 강의하면서 계율을 정비하였다. 마침내 대국통이 되어 전국의 교단을 통솔하면서 수계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나라 안 사람으로서 그에게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집에 여덟, 아홉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교화의 영향은 컸다.

자장의 저술에 관해서는 ‘속고승전’ 자장전에서 “여러 경전과 계율 관련 주석서 10여 권을 찬술하였고, ‘관행법(觀行法)’ 1권을 출간하였는데, 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다”고 했으나, 오늘날 이름이 전해지는 것은 5종뿐이다. 앞의 ‘관행법’ 1권 이외에 아미타정토신앙에 관한 것으로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과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이 알려졌는데, 사실상 같은 책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내용 가운데 일부 단편이 일본 승려 양충(良忠)의 ‘법사찬사기(法事讚私記)’ 권하에 인용되어 있다. 

자장의 아미타신앙은 범부의 서방왕생을 거부하는 별시의설(別時義說)에 입각한 섭론학자들, 특히 자장이 당의 장안에서 직접 수학한 바 있던 법상(法常)의 학설에 영향 받은 것으로 추측되며, 후대의 법상종 승려들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자장의 아미타신앙은 ‘중고’시기 유행했던 미륵신앙을 선양하기 위한 전제로써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장의 아미타신앙은 범부의 왕생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원효 등 불교대중화 운동가들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자장은 황룡사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하는 등 교단정비를 위하여 계율교육을 강화시켰는데, 계율관계 저술로서는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1권과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1권을 들고 있으나, 오늘날 모두 전하지 않는다. 자장이 강의한 경전과 저서의 이름을 통해서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를 동시에 연구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계율관과 교단통제의 효용성 등을 고려할 때 그의 불교에서 근본적인 계율은 당 도선에게 영향 받은 사분율(四分律)이었다고 본다. 신라 불교계에서 대승보살계사상이 전면적으로 검토되고 특히 범망계(梵網戒)가 중시되는 것은 역시 원효 이후였다. 결국 자장은 ‘중고불교’의 완성자이자 최후를 장식한 인물로서 신라불교의 역사에서 실로 한 획을 긋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은 10여 곳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는 절로는 통도사(通度寺)・태화사(太和寺)・원령사(元寧寺)・수다사(水多寺)・석남사(石南寺, 오늘날의 淨岩寺)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조에 의하면, “선덕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643)에 자장 법사가 가져온 부처님의 두골과 어금니와 불사리 1백 낱과 부처님이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태화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에 두었으며, 그 나머지는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여 자장이 사리탑(舍利塔)의 건립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중국불교사에서의 사리탑 건립은 수나라 문제(文帝)의 불교정책의 최후를 장식했던 불사였다. 수 문제의 불교정책의 목표는 불교를 가지고 통일국가로서의 수나라의 정신적 지주를 삼으려는데 있었다. 그 때문에 수대 불교는 국가종교로서의 색채가 농후하였다. 그러한 불교치국책은 국가종교정책의 근본도량으로서의 대흥선사(大興善寺)의 설립, 학문연구와 대중교화를 위한 오중(五衆)과 이십오중(二十五衆)의 설치, 사리탑의 건립 등으로 구현되었다. 특히 사리탑의 건립은 수문제의 말년인 인수(仁壽) 연간(601~604)에 집중되었는데, 4년 동안 전국에 건립된 탑의 수가 110개소에 이르렀다. 문제의 사리탑 건립은 불교의 보시의 이상을 바탕으로 황실과 국민 모두가 그 공덕을 받기 위한 것이었는데, 자장의 불교치국책과 사리탑의 건립은 그 영향이었음이 분명하다. 수문제의 불교치국책이 처음으로 신라에 전해진 것은 자장보다 한 세대 앞서 진평왕 27년(605) 수나라에서 귀국한 안함(安含)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안함은 그러한 정책을 실시하지 못하고 자장의 귀국보다 3년 앞선 선덕여왕 9년(640)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자장에 의해서 마침내 실현을 보게 된 것이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의 9층목탑 건립이었다. 

자장의 건의에 의한 황룡사의 9층목탑 건립은 신라 최대의 불사였다. 당시의 건축 기술을 감안할 때, 높이 80여m에 달하는 목조건축물을 1년 만에 준공하였다는 것은 국력을 기울인 사업이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그 공사의 감군(監君)으로서 왕궁과 왕실 재산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이찬 용수(龍樹, 뒤의 龍春)가 임명되고, 대장(大匠)으로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청되었던 사실이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건설사업을 총괄한 용수는 앞서 진평왕 44년(622)에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등 3궁을 관할하는 내성(內省)의 사신(私臣)에 임명되었는데, 내성은 막대한 재화(財貨)・전장(田莊)・노복(老僕)을 소유하고 있었고, 또한 국왕의 근시기구(近侍機構)들을 거느리고 있는 관부였기 때문에 그의 인적・물적 자원이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거대한 공사를 마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국력을 기울인 건축 사업에 호국의 사상적 이념을 제공한 것은 자장이었다. 대외적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이 치열해지고, 대내적으로 여왕에 대한 반대여론이 비등해지고 있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민심을 집결하고 여왕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상징적인 건축물로서의 의의를 부여한 것이 바로 자장에 의해 정립된 불국토설(佛國土說)과 진종설(眞宗說, 刹帝利種, Kṣatriya종)이었다. ‘삼국유사’권4 황룡사구층탑조에서는 자장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전해주고 있다. “너희 나라 왕은 천축(天竺)의 찰(제)리종족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황룡사의 9층탑을 포함한 신라 호국의 3보설도 자장에 의해 비로소 정립된 것이다. 진흥왕 35년(574)에 조성된 황룡사의 장육존상(丈六尊像)・진평왕대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선덕여왕대의 황룡사의 9층목탑과 함께 호국의 신성물(神聖物)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것은 자장 때이다. ‘삼국유사’ 권4 황룡사장육조에서는 자장이 역시 오대산에서 현신한 문수보살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전해주고 있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불(釋迦)과 가섭불(迦葉)이 강연한 땅이므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러므로 인도의 무우왕(無憂王, 阿育王, Aśoka)이 황철 약간을 모아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1천3백여 년이나 지난 뒤에 너희 나라에 이르러 (불상이) 이루어져서 그 절에 모셔졌던 것이니, 대개 위덕의 인연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황룡사의 9층탑을 비롯한 호국3보설의 사상적 배경은 바로 자장의 열렬한  문수신앙이었음을 말해주는 설화이기도 한 것이다.

자장은 최고 진골귀족 출신으로서 선덕여왕과 용수 등 국왕과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대국통으로서 교단을 통솔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그의 말년은 지방에 쫓겨나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자장의 말년 비참한 모습을 ‘삼국유사’ 자장정률조에서는 설화적인 형태이지만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만년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군(江陵郡)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살았다. 다시 꿈에 북대(北臺, 五臺山)에서 보았던 한 이상한 모양의 중이 나타나서 고하기를,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그대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자장이) 놀라 일어나서 일찍 송정(松汀)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온지라 불법의 요지를 물었다. 말하기를, ‘태백산(太伯山)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고,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자장이 태백산에 가서 찾았는데,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시자에게 말하기를, ‘여기가 이른바 갈반지이다’고 하였다. 이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淨岩寺)을 세우고 문수대성이 내려오시기를 기다렸다. 이때 어떤 늙은 거사가 남루한 방포(方袍, 장삼)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에게 말하기를, ‘자장을 보려고 왔다’고 하였다. 

시자가 말하기를, ‘좌우에서 시종한 이래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보지 못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미친 말을 하느냐?’고 하였다. 거사가 말하기를, ‘다만 너의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하였다. (시자가) 드디어 들어가서 고하자, 자장도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아마도 미친 사람이겠지’라고 하였다. 시자가 나가서 그를 꾸짖어 쫓으니, 거사가 말하기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삼태기를 거꾸로 들고 터니 강아지가 변해서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고, 그 위에 올라 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위의를 갖추고 빛을 찾아 남쪽 고개로 달려 올라갔으나, 이미 아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드디어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화장하여 유골을 석혈(石穴) 속에 모셨다.”

이상의 자료를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자장 말년의 쓸쓸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내용이기 때문이다. 최고 진골귀족 출신 대국통으로서 불교교단을 통솔하였던 고승 대덕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자장은 선덕여왕~진덕여왕 때에 정치적 실권자였던 용수-춘추 부자와 협력하여 황룡사의 9층탑을 건립하고, 중국의 의복제도와 연호를 시행케 하는 등 당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으나, 진덕여왕 5년(651) 김춘추가 집사부를 중심으로  행정관서를 정비하고, 운영원리로써 유교를 채택하면서 자장의 불교치국책은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법원주림전’ 권64 자장전에서 자장의 입적 연대로 추정한 ‘영휘(永徽)년중(650〜655)’이 바로 자장이 지방으로 쫓겨나 입적한 때였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23호 / 2020년 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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