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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선희의 ‘묻다'

기자명 박사
  • 박사의 서재
  • 입력 2020.02.04 10:26
  • 수정 2020.02.04 10:38
  • 호수 1523
  • 댓글 0

묻혀진 것을 묻고 또 묻는 자의 힘

건조해도 처참한 살처분 기록
살처분 매몰지 2년 이상 추적
생명가치·경제성 부적합 결론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할 때

‘묻다'

사람들은 죽음이 실감나야만 진지하게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화장실에서 나올 때 손을 씻는다는 단순한 습관부터, 생명의 가치와 무게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까지. 그런 의미에서 치명적인 전염병은 계시 같다. 정신 바짝 차리라는 계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계시. 다른 이의 고통과 죽음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계시. 나의 고통과 아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계시. 

전염병이 나와 남의 사이가 생각보다 멀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면, 전염병에 대한 대처는 우리가 생명에 어떠한 등급을 매기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에게 옮는 병이 아니라도 그렇다.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가”그것이 모든 대처의 핵심 질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 ‘기준’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에 나온 숫자들은 건조하지만, 들여다보면 처참하다. 2000년 이후 가축 전염병으로 살처분당한 동물의 수는 9800만 마리. 2010년 겨울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천만마리가 넘는 동물들이 생매장당한 살처분 매몰지가 4799곳. 2016년 겨울 조류독감으로 살처분된 가금류 3300만 마리. 2019년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소가 2000마리다.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왼쪽에는 사진이, 오른쪽에는 숫자가 적혀있다. 2312, 1588, 11800, 15000, 2241, 2654…. 이 사진들이 전시되었을 때, 관람객들은 “가격이야?”라며 낄낄대기도 했다고 한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 나가는 출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 사진들은 구제역과 조류독감 매몰지 3년 후를 촬영한 것이며, 제목으로 쓰인 숫자들은 그 땅에 묻힌 동물들의 수입니다.”

저자는 2014년의 어느 날, 3년 전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조성되었던 매몰지가 법적으로 사용 가능한 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정말 사용 가능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저자는 비교적 가까운 매몰지를 찾아가본다. 그곳에서 기묘한 오리냄새를 맡은 저자는 발을 들였다가 오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갑자기 물컹, 하고 땅이 꿀렁거렸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발길 닿는 곳마다 물컹거리며 바닥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그것은 눈이나 진흙을 밟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기세로 요동쳤다.” 그 경험 이후, 저자는 살처분 매몰지를 2년 이상 추적하고 기록하게 된다. 산채로 묻어버리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땅을, 사진기를 챙겨 들고 집요하게 찾아다닌다. 

저자는 썩고 곰팡이가 피고 생명력을 잃은 땅의 사진을 찍는 한편 대량 살처분 방식은 합당했는지 파고들어 조사한다. 생명의 가치보다 경제성, 합리성을 우선시하여 결정한 ‘살처분’이라는 방법이 생명의 가치를 생각한다는 측면에서나 심지어 경제성의 측면에서도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책을 읽는 동안 차츰 명백해진다. 한편에서는 무고한 짐승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생매장을 했어야 했던 사람들이, 또 한편에서는 자식처럼 키운 동물들을 한꺼번에 강제로 ‘처분’해야 했던 이들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 누구를 위한 살처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묻고 또 묻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묻다’는 땅에 파묻을 때도 쓰는 말이지만,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한 질문을 할 때도 사용하는 말이다. 저자는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을 언론에 투고하고 전시를 열며 사람들에 함께 묻기를 권한다. 그의 전시를 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돌아보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진심이 움직인다. 전시를 본 한 남자는 작은 사이즈의 사진 한 장을 살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판매하지 않는다는 말에 남자는 “제사라도 지내주고 싶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23호 / 2020년 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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