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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명국의 화선일미(畵禪一味), 달마도-상

기자명 주수완

세속 화가에게 중요 장르 하나로 넘어온 달마도

불화 스타일과 많이 다르지만 달마도 역시 불화의 일종
통신사로 일본 찾은 김명국 그림 솜씨에  일본인들 환호
본국에서 받아보지 못 한 환대에 감격해 눈물 흘리기도 

남송 화가 양해의 ‘발묵선인도’(대만고궁박물원, 1140년경, 27.7×48.7㎝).

비록 억불숭유의 시대였던 조선에서도 지난 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궁정화가의 신분으로 불화를 남긴 사례가 있었지만, 이후 역시 궁정화가였던 김명국이 불화를 그렸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너무나 잘 알려진 ‘달마도'를 불화라고 불러야할지 말아야할지 조금 망설여지기는 한다. 즉, 일반적으로 불화라고 하면 그 앞에서 예불을 드리거나 의식을 행하는 용도로 그려진 경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데, 김명국의 '달마도'도 그러한 예불이나 의식용이었을지 다소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달마도'의 주인공인 달마대사가 부처님은 아니었기 때문에 예불용 불화가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절의 조사당에는 고승들의 진영이 걸려있고, 그 앞에서도 의식을 행한다. 고승진영은 분명히 불화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달마도'는 어떨까? 의식용 불화라면 채색이 되어 있어야하고, 매우 정성스럽고 정교한 필치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파격적인 수묵인데다, 종교화란 경건한 마음으로 그려야하는 것임에도 이 그림은 그야말로 술에 취해 붓을 휘날린 것처럼 보이니 언뜻 경건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김명국은 실제로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김명국의 ‘달마도’ (국립중앙박물관, 1636년 혹은 1643년, 25.2×30.3㎝)

그런 ‘달마도'가 불화일까? 과연 이 앞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 한편으로는 요즘 스님들의 선방에 김명국의 ‘달마도'풍을 따른 달마도가 많이 걸려 있기 때문에 엄연히 불화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달마도'가 일종의 부적으로써 불자의 집에 걸어놓으면 복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며, 거기다 금분으로 그린 달마도 광고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달마도를 마치 난초나 대나무처럼 일종의 붓질을 연습하고 솜씨를 드러내는 정형화된 하나의 장르로써 그리는 분들도 많다. 비유하자면 ‘달마도'는 이제 서양화의 뎃생 연습용 아그리파 석고상과 같은 역할을 수묵화에서 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물론 김명국의 ‘달마도'가 불교라는 종교적 용도를 전혀 벗어나 단순한 인물화의 범위에서 그려진 것은 아니겠지만, 여하간 우리가 그간 익히 보아온 불화의 스타일하고 많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불화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뭐한 종류의 그림들은 흔히 ‘도석화(道釋畵)’라고 하여 별도의 분야로 분류되고 있다. ‘도석’이란 도교(道)와 불교(釋) 주제를 다룬 그림을 말한다. 그러나 도교와 불교를 의식하면서도 굳이 도교화나 불화로 분류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그림들의 특수성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세속의 화가들이 불화 장르에 뛰어들어 걸작을 남겼던 지난 회까지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제는 불화가 세속화가들에게 중요한 장르의 하나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이러한 불교주제의 그림이 김명국 당시 조선에서 유행했는지 아닌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 ‘달마도'는 원래 김명국이 일본에 건너가서 그려준 것이기 때문에, 조선사회에서도 달마도의 수요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김명국이 특별히 불자였다거나, 혹은 앞서의 이상좌처럼 당시 왕실에서 궁정화가들을 불사에 동원했다는 정황도 딱히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런 그림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정교한 채색화로서의 불화가 아닌 이러한 수묵계통의 불화가 중국 송나라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남송대의 궁정화가 양해(梁楷)의 ‘발묵선인도’ 같은 그림은 김명국 ‘달마도'의 시원격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양해 역시 술에 취한 채 그림을 그렸다고 전하는 것은 김명국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여하간 이러한 그림들이 조선과 일본에도 알려졌는데, 다만 성리학 중심의 조선에서는 이런 그림이 널리 유행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김명국에 관해 전해지는 기록에도 파격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은 있지만, 지금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이 ‘달마도'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그가 1636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처음 일본에 건너갔을 때, 일본에서는 이런 수묵계통의 불화가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었고, 김명국은 이번 기회에 자신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한번 붓을 휘두르자, 조금 속되게 말하면 그간 달마도를 그려왔던 일본의 화가들이 모두 쓰러진 셈이다. 일본에서 당시 조금이라도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구름떼처럼 김명국에게 몰려들어 그림을 그려달라고 졸랐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통신사의 일정을 기록한 부사 김세렴의 ‘해사록’에는 그 성화에 김명국이 울려고 했다고 적었다. 보통은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이 힘들어서 울려고 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혹 조선에서는 그저 그렇고 그런 그림 그리는 환쟁이 대접만 받다가 일본에서 처음 받아보는 팬들의 인기에 감격해서 울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 그는 이때 일본에 건너가면서 인삼을 몰래 팔아 금전적 수입을 올리려고 했다고 한다. 여하간 법을 어기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궁정화가까지 된 사람이 오죽이나 궁핍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대접을 받다가 일본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돈을 주며 그림을 사려는 것을 보고는 감동을 받지 않았을까? 혹 그가 몰래 가져다 팔려고 했던 인삼상자가 일행에게 발각된 것은 그가 인삼을 팔 필요도 없을 만큼 그림을 그려주느라 바쁘고 수입도 괜찮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 바람에 밀매 시도가 발각되어 김명국은 이후 통신사행에서 영구제명될 뻔 했지만, 일본에서 콕 짚어 김명국을 다시 보내달라고요청할 정도였고, 결국 1643년에 다시금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아마 두 번째 통신사행에서는 작정하고 그림으로 한 몫 챙기려는 생각에 인삼은 챙겨가지 않았으리라.(계속)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23호 / 2020년 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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