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무상정등각-하
6. 무상정등각-하
  • 현진 스님
  • 승인 2020.02.11 14:02
  • 호수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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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 실천하면 안정된 마음 닦을 수 있어

금강경서 마음 닦는 방법으로
무주상보시 반복 실천 강조해
불도 완성 위한 전제 조건으로
일체중생 모두 제도할 것 발원

빠알리어 찟따(citta)와 마노(mano) 및 윗냐너(viññāṇa)를 범어 동사어근의 손을 빌려 그 어원(語源)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찟따는 동사어근 찟(√cit, 인지하다, 인식하다, 알다)에서 왔고, 마노는 동사어근 만(√man, 생각하다, 고려하다, 여기다)에서 왔으며, 윗냐너는 동사어근 즈냐(√jñā, 알다, 배우다, 깨닫다)에 동사전치사 위(vi­, 잘 혹은 나누어)가 첨부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셋 모두 ‘알다’ 계통의 단어인데도 찟따는 인지하여 알다로, 마노는 생각하여 알다로, 그리고 윗냐너는 분석을 통해 알 수 있게 된 상황 등으로 조금 더 세분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마음’은 한문의 심(心)・의(意)・식(識)은 물론 각(覺)이나 견성(見性) 등과도 두루 연분을 맺고 있는 발 넓은 단어이다. 그래선지 ‘마음’이 사용된 말이나 문장을 만나면 거개가 명쾌한 의미로 와닿지 않는 게 일반적인데, 그럴 때는 비록 한문에 심(心)이라 되어있더라도 ‘마음’만을 고집하지 말고 번역어를 조금씩 변화시켜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한문경전의 심(心)자는 ‘마음’을 적용시킬 때보다 우리말인 ‘생각’으로 옮겨놓으면 오히려 속이 후련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범어본의 찟따(citta)를 한역본에서 심(心)으로 옮겨놓았다고 하여 기계적으로 ‘마음’으로 놓고 읽을 것이 아니라 위의 내용을 참조하여 조금 변화를 시켜본다면 ‘마음’을 ‘인식(認識)’으로 대치시켜놓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면 앞서 본 문장은 “대승불자로서 해탈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인식을 안정시킬 수 있고,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인식을 가다듬을 수 있으며,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된 인식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지 수보리는 부처님께 질문 드렸다.” 정도가 될 것이다. 국어사전에 인식(認識)은 “심리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과정”이라고 설명되어있다.

사홍서원에서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가없는 중생을 모두 제도하길 서원함)가 맨 먼저 서술된다. 이는 다함없는 번뇌를 끊고 한량없는 법문을 배우며 항상 없는 불도를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가없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모두 제도하길 서원함으로써 그 서원을 이루고자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우게 되며, 그 결과 불도를 이루게 되면 자연히 모든 중생을 제도한 게 된다는 의미이다.

‘금강경’에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통해 자신의 인식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사홍서원의 그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은 일체중생을 그 대상으로 하기에 넓은 마음[廣大心]이요, 중생을 궁극적인 무여열반에 들게 하리라 했으므로 으뜸 된 마음[第一心]이며, 중생을 모두 제도하고도 제도한 중생이 없다고 여기니 변함없는 마음[常心]이요, 그러면서도 4상(四相)을 갖지 않으므로 거꾸러지지 않은 마음[不顚倒心]이다. 꼭 중생을 모두 제도해야만 인식이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제도를 서원하며 그런 네 가지의 마음을 갖게 된다면 어찌 그 인식이 안정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안정된 인식을 어떻게 닦아서 가다듬느냐 하는 문제는 6바라밀, 그 가운데서도 보시바라밀에 해당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머무는 모습 없이 보시함)의 반복적이고도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때의 보시바라밀은 6바라밀을 전체적으로 포괄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렇게 안정되었다가 닦여서 가다듬어진 인식은 단지 4상(四相)에 대한 집착만 갖지 않는다면 별다른 과정이 필요치 않은 채 자연스레 장악될 수 있음은 앞서 밝혔다. 비록 4상에 대한 집착을 갖지 않는 것이 그리 녹녹치 않겠지만….

그러고 보니 수보리는 부처님께 드리는 질문에 이미 답을 얹어놓았으며, 부처님은 단지 그것을 수긍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금강경’이 수보리 질문의 말미에서 끝나지 않는 까닭은 다양한 근기를 지닌 중생들을 위해 이리 말씀하시고 저리 말씀하신 부처님의 자비심이 연이어 놓여있기 때문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24호 / 2020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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