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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처님 진신사리 언제 어떻게 전래됐나

진흥왕, 문무백관과 흥륜사까지 나와 사리 영접

한반도에 불교 전래된 4~6세기경이 사리 신앙 정착한 시기
최강국 양나라, 549년 신라 귀국하는 각덕 스님편에 전달해
진신사리 전래는 신라불교 발전 결정적 계기 됐던 일대사건

549년 중국에서 신라에 처음 들어온 진신사리 일부가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화사 금당암 삼층석탑(보물 248호).

진신사리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 분명히 나오는 기록은 딱히 없다. ‘삼국유사’에 몇 편의 사리 관련 기사가 강조되어 있는 것 말고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불교사의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생각할 때 4~6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으니, 사리신앙이 정착된 시기도 이 무렵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다.

진신사리를 들여오고 사리신앙을 알리는데 가장 앞장섰던 계층은 인도와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스님들이었다. 특히 자장, 의상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라 고승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로 상징되는 혹독한 종교적 시련을 겪고 나서야 불교가 허용되었을 만큼 불교 전파과정이 순탄치 못했지만, 이후 비약적 발전을 통해 삼국통일의 원동력을 이루었으니 뒤로 움츠린 만큼 앞으로 뻗어나간 힘은 컸다. 그래서인지 불사리에 관련된 기록이나 일화도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훨씬 풍부한 편이다.  

고대의 불사리 전래 기록 중 가장 이른 것은 “진흥왕 10년(549) 봄에 양(梁)나라가 불사리 약간을 신라에 보내왔다”는 기사다(‘삼국사기’ ‘진흥왕’조). 양은 중국 남조(南朝)의 네 나라 중 최강국이었는데 그 28년 전인 521년에도 원표(元表) 스님을 파견해 신라 왕실에 불교를 소개해주었을 정도로 신라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549년에도 신라로 귀국하는 각덕(覺德) 스님 편에 사신 심호(沈湖)를 동행시킴으로써 진신사리 전달의 의미를 극대화시키는 외교적 수완을 보였다. 양나라 입장에서는 신라와의 우호 증진을 위해 귀한 선물을 보낸다고 생색내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진신사리는 중국에서 매우 귀한 보배로 여겨졌던 데다가 수량도 한정되어 있어서 중국 정부는 외국으로 반출되는 일에 매우 민감했다. 반대로 우리 입장에서는 진진사리를 가져오는 게 그만큼 어려웠다. 고려 문익점이 송나라에서 목화 씨앗을 붓 뚜껑에 담아 몰래 가져온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고 말한다면 적당한 비유가 될까. 이렇게 우리나라에 진신사리가 전래된 역사를 보면 파란만장했으니, 어떻게든 고국으로 가져가려는 신라의 스님과 이를 막으려는 중국 관리들과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국경까지 이어진 적도 있었다.

549년에 전래된 진신사리가 “약간”이라고 표현된 것을 보면 수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숫자의 많고 적음보다는 진신사리가 처음 이 땅에 전래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이는 당시 신라 사람들이 보인 태도와 인식에도 잘 드러난다. 진흥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흥륜사 앞길까지 나가서는 중국에서 오는 일행을 공손히 맞이했고, 수많은 백성들 역시 왕 뒤에 서서 열렬히 환호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왕이 궁을 나선 예는 전무후무하다. 중국을 상국이라 여겼던 조선시대에도 아무리 지체 높은 사신이 온다한들 없던 일이다. 하지만 이때는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 모두 진신사리는 곧 부처님이라고 생각했기에 부처님을 맞이한다는 마음으로 진신사리에 대해 예를 다하여 영접했던 것이다. 약소국 신라가 단기간에 일약 강대국으로 성장한 동력을 불교에서 찾을 때면 불교를 통해 국력을 하나로 결집했던 일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신라 사회에서 불교를 중요시 여기게 된 배경 중 하나가 유독 강렬했던 사리신앙 때문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 역사서에서 신라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사상 특기되는 사건으로 꼽히는 643년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 역시 따지고 보면 사리신앙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신라에서 사리신앙이 촉발된 직접적 계기는 바로 549년의 흥륜사 사리 영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549년 진흥왕이 궁궐을 나와 중국에서 오는 진신사리를 맞이했던 흥륜사지(사적 15호).

그런데 양나라에서 가져온 이 불사리 ‘약간’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후대의 어떤 기록에도 그 뒷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역사가들도 이 일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 온 이 최초의 불사리는 한참을 건너 뛰어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야 다시금 등장한다. 무려 1300년이 지난 뒤 까마득하게 잊혔던 최초의 진신사리 이야기를 꺼낸 이는 허훈(許薰, 1836~1907)이다. 이익(李瀷) 학파를 계승한 정통유학자이면서 아무도 몰랐던 불교사의 이면을 기록해둔 그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은데, 고향이 신라 최초의 사찰 도리사가 있는 경북 선산(현 구미시)이라는 점이 우연만은 아닌 듯 비쳐진다. 그는 ‘금당탑기’에서 동화사 금당암 앞에 석탑(보물 248호)이 세워지게 된 연유를 적으면서 ‘삼국유사’에도 안 나오는 자세한 이야기를 남겼다. 신라 각덕 스님이 양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는 모두 1200과(顆)가 넘었으며 사리함에 정성스레 담겨 신라 왕실에 보내졌고, 이를 통해 불심이 더욱 돈독해진 진흥왕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 진신사리들은 582년 전국 여러 사찰로 보내졌는데 특히 대구 동화사에 그 대부분이 봉안되었고, 이 중에서 7립(粒)은 281년 뒤인 863년에 경문왕이 동화사에 석탑을 세울 때 사용되었고 875년에 금당암 앞마당으로 이건되었다. 1958년 이 탑을 수리할 때 허훈의 이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만큼의 진신사리와 소탑(小塔) 99기가 발견되었다(김희경, ‘한국의 탑’, 1982). 

그런데 ‘금당암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처음 전해졌을 때 ‘약간’이던 사리가 얼마 안 되어 어떻게 1200과로 갑자기 늘었을까 하는 점이다. 사리를 쪼개어 여러 개로 나눈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강도(剛度)가 다이아몬드 정도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사리는 그야말로 금강석처럼 단단하다. 이런 사리를 잘게 잘라 여러 개로 나누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분사리(分舍利)’가 되었던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분사리는 하나의 사리가 여러 개로 나뉘는 현상으로, 사리에서 뿜어나오는 밝은 빛이 사방으로 뻗치는 ‘서광(瑞光)’ 현상과 함께 사리신앙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개념이다. 분사리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신라에 처음으로 부처님 사리가 전해진지 올해로 1471년이 되었다. 진신사리의 전래가 신라 불교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된 일대사건이었음을 불교사의 이정표에 잘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24호 / 2020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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