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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울 봉원사와 이동인 스님

개화파들 불러 보아 사찰을 갑신정변 요람지로 만들어

스님 신분으로 조선의 근대화 이끈 선각자, 동인 스님
일본서 가져온 선진문물 전파하며 고종 특사로도 활동
한국전쟁 때 화재로 동인 스님 등 개화파 유물도 소실

서울 봉원사는 동인 스님이 일본으로 밀입국 하기 전 5년간 주석한 곳으로 개화파 주역이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자주 모여 토론을 벌이고 근대문명과 관련된 책을 읽었던 개혁의 요람지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불교는 탄압 속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스님들의 도성출입은 금지됐고 고된 노동이었던 산성축조에 동원되면서도 급료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먹을 양식과 의복, 땔나무 등을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노동력이 많이 드는 한지를 제조해 공납으로 바쳐야 했고 산나물·꿀·미투리 등을 납부하는 잡역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양반과 아전들로부터 갖은 방법으로 스님들을 괴롭히고 모욕했다. 

탄압 속에서 불교는 크게 위축됐다. 법을 구하고자 인도나 중국 등 해외 유학길에 나서는 스님들의 발길도 끊겨 조선시대에는 유학승에 대한 기록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불교계의 수난은 근대 사회에서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조선말에도 정치 상황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세계는 급변하고 있는데 조선의 지식인들은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위정척사를 고집하고 있었다.

강화도조약(1876년, 고종13)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일본불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일본은 조선에 일본불교를 퍼뜨림으로써 친일세력과 친일여론을 확산시키고자 했다. 이에 부응해 정토진종 본원사(本願寺)의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가 부산으로 건너와 포교하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877년 11월이다. 오쿠무라가 개설한 부산 포교당은 일본인 신자뿐 아니라 조선인 신자들로 성황이었고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현재 대각사로 불리는 이 포교당은 구한말 개화승으로 유명한 이동인 스님(李東仁, ?~1881)의 채취가 묻어있다. 서울 봉원사에 주석하며 개화파 인사들과 긴밀한 인연을 맺었던 동인 스님은 19세기 후반 서울과 부산,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현해탄을 넘나들다 바람처럼 사라진 인물이다. 동인 스님은 개화파들의 문서에서 한국 근대화를 위해 개화운동을 펼친 개화승으로 기록돼 있다. 스님은 개화파의 주역이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각종 자료에서 이들이 서울 봉원사에 자주 모여 토론을 벌이고 근대문명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동인 스님이 부산 포교당의 오쿠무라와 인연을 맺은 건 1878년 12월이었다. 오쿠무라는 포교당으로 직접 자신을 찾아온 동인 스님의 비범함을 첫눈에 알아봤다. 특히 당시 천대받는 스님임에도 진보적인 지식인이나 왕실 관리와도 깊이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동인 스님을 더욱 특별히 보도록 만들었다. 개화에 대한 열망을 품었던 동인 스님은 오쿠무라의 도움과 봉원사에서 연을 맺은 개화파들의 후원으로 1879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밀입국이었다. 

스님은 일본 교토의 동본원사(東本願寺)에서 10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어와 일본불교를 공부했다. 또 변모된 일본 사회를 살피고 근대 시설을 돌아보기도 하면서 정치가들과도 접촉했다. 스님은 때때로 일본의 새로운 제도, 교육, 공장, 과학 기술 등 근대문물과 관련된 책을 구입했다가 이를 모아 봉원사로 보내 서재필, 김옥균 등 개화파들에게 전달했다. 이들은 그 책을 통해 일본 사정을 알게 됐고 더욱 열렬한 개화파가 됐다.
 

개화승으로 일본을 왕래해면서 근대 문물을 조선에 소개했던 동인 스님.

1880년 4월 동본원사에서 수계식을 마친 동인 스님은 조선통신사들이 머물던 도쿄의 천야별원(淺野別院)으로 갔고 이곳에서 스님으로 활약하며 일본의 정객은 물론 서양 각국의 외교관들과도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또 조선과 아시아가 전근대적인 미몽에서 깨어나 서양 제국주의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고민하고 토론하는 아시아 지식인들의 모임 ‘홍아회’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혈혈단신의 몸으로 정열적인 활동을 벌이던 1880년 7월, 동인 스님은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온 조선왕조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을 만났다. 동인 스님과 대화를 나눈 김홍집은 스님의 비범함에 감탄하며 민영익 등 왕가의 여러 귀족과 권문세족들에게 동인 스님을 소개했다. 성냥을 비롯해 석유, 지도, 풍속도, 요지경 등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온 동인 스님은 이들 앞에서 가느다란 성냥을 꺼내들어 기둥에 그어 불을 일으켰다. 자리에 있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 소문이 고종에게까지 전해졌다.

민영익의 사랑방에 거처하며 그의 주선으로 고종을 만난 동인 스님은 일본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국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스님의 탁견과 충정은 고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조선의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했다. 동인 스님은 조선의 자주를 위해서는 일본뿐 아니라 미국과도 수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동인 스님은 고종의 명을 받아 김홍집과 함께 1880년 10월 다시 일본으로 밀파돼 주일청국공사에 한미조약체결을 알선하는 등 개화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인 스님이 돌아와 일본 시찰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 분량이 방대해 100여 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에는 철저하게 비밀로 붙여졌던 시찰기에는 염초나 성냥 제조법 등도 함께 기록돼 있었다. 동인 스님의 치밀한 계획과 왕성한 신문물 탐구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문이다. 

고종은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개화파 주장을 받아들여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근대적 제도 개혁을 서둘렀다. 동인 스님은 특별 채용한 임시직인 별선군관이라는 이름으로 인재를 뽑는 부서인 전선과 외국어 관련 일을 하는 부서인 어학사의 참모관이 됐다. 억불의 조선시대, 스님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벼슬을 얻은 것이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동인 스님이 널리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다.

동인 스님은 일본이나 청 등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대포와 군함 구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다음 해 3월, 참모관으로서 고종으로부터 명을 받은 스님은 총포와 선박구입을 알아보기 위해 현해탄을 다시 건널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출발 직전, 동인 스님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민영익 집에 머물러 있던 스님이 누군가를 따라나섰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이후 개화를 반대하던 흥선대원군이 자객을 보냈다거나 일본이 조선의 자주화를 꺼려 살해한 것이라는 뒷소문만 무성했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몸소 횃불을 짊어지고 스스로 불구덩이가 되고자 했던 젊은 스님은 불꽃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이후 동인 스님과 함께 활동했던 무불 스님이 신사유람단 선발대를 이끌고 배 구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급사하면서 개화승의 활동도 끝이 나게 된다.

스님의 신분으로 많은 일을 벌인 동인 스님의 생애는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에 들어 몇몇 사학자들은 동인 스님이 친일파의 원조라고 평한다. 동인 스님이 개화파로서 처음으로 창씨개명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아사노 쓰기노스(朝鮮野蠻)라는 일본식 이름에서 드러나듯 동인 스님은 늘 스스로를 ‘조선의 야인이자 깨달음이 더딘 중생’이라 자책했다. 창씨개명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열정 때문이었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화파들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비밀모임을 가져왔던 봉원사는 지금도 갑신정변의 요람지로 불린다. 1911년에 사지 확보를 통한 불사를 통해 가람의 면모를 일신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면서 안타깝게도 동인 스님과 개화파 인사들의 유물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봉원사가 개혁의 요람지였다는 것은 서재필의 자서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들처럼 인민의 권위를 세워 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여. 이것이 우리가 개화로 첫 번 나가게 된 근본인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라는 중이 우리를 잘 인도해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새 절(봉원사)이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 할 것이다.” (‘서재필 박사 자서전’ 중)

이제 봉원사에서는 구한말 암흑기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몰아내는 불꽃으로 살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사라져버린 동인 스님의 흔적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봉원사는 여전히 이 땅 위에 굳건하게 서 있고,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대가람이 되어 전법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동인 스님이 그토록 바랐던 우람한 나라와 함께 말이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25호 / 2020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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