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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㊵ 원광의 불교사상과 새로운 사회윤리관 ①

진·수나라 신사조 불교 수입, 신라불교 사상수준 한 차원 높여

원광, 자장에 한세대 앞선 진평왕대 활동했던 대표 인물
‘속고승전’에 자장과 함께 신라인으로 입전된 2인 중 1인
행적 자료 6종 확인…사료적 가치  ‘속고승전’이 가장 높아

금곡사지 원광법사부도탑. 경북문화재자료 97호.
금곡사지 원광법사부도탑. 경북문화재자료 97호.

신라 ‘중고’시기의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자장과 함께 원광(圓光)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자장이 27대 선덕여왕대(632〜647) 불교의 상징적 인물이라면, 원광은 그보다 한 세대  앞선 26대 진평왕대(579~632)의 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13세기에 편찬된 ‘삼국유사’ 가운데 불교 교학승들을 다룬 ‘의해(義解)’편에서 ‘자장정률(慈藏定律)’과 ‘원광서학(圓光西學)’이라고 각각 제목을 부치어 자장에게는 계율을 정비한 업적을 강조한 반면, 원광에게는 중국에 유학한 선구자로서의 업적을 내세움으로써 차이점을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이들 2인은 7세기 중반에 편찬된 ‘속고승전’에서 신라인으로는 유일하게 입전(入傳)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자장은 ‘호법(護法)’편, 원광은 ‘의해義解’편으로 다르게 분리되어 편입됨으로써 중국 불교계에서도 다르게 평가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장은 계율의 정비를 통한 교단 중심의 활동과 황룡사 9층목탑의 조성으로 대표되는 왕권강화를 위한 활약이 돋보이는 반면, 원광은 진(陳)・수(隋)의 다양한 신사조의 불교사상의 수입, 유교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윤리덕목의 제시 등 신라 불교와 사상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두 사람의 이러한 차이는 우선 자장은 최고귀족인 진골출신이었던데 반하여 원광은 박(朴)씨, 또는 설(薛)씨라고 한 바와 같이 그보다는 낮은 가문 출신이라는 출신성분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지만, 또한 진평왕대와 선덕여왕대의 정치적 상황과 불교 역할의 변화에서도 두 사람의 불교 내용과 사회적 역할을 다르게 하였던 것으로 본다. 

한편 8세기말〜9세기초 신라문화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이전의 문화와 불교를 뒤돌아보게 되었는데, 불교계에서는 그의 일환으로 역대의 고승대덕 10인을 선정하여 소상(塑像)으로 조성하여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의 금당 동쪽과 서쪽 벽에 안치하였다. 10인의 고승, 곧 10성(聖)은 불교공인 때의 아도(阿道)와 염촉(厭髑), 국가불교 성립의 안함(安含)과 자장(慈藏), 불교대중화 운동의 혜숙(惠宿)과 혜공(惠空), 중대 신불교 성립의 원효(元曉)와 사파(虵巴), 화엄종의 의상(義湘)과 표훈(表訓) 등이다. 10인의 명단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장은 포함된 것에 반해 원광은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13세기의 일연은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원광을 ‘의해’편의 제일 앞에 싣고, 당시 전해오던 원광 관계 자료들을 집성하였으며, 또한 ‘원광서학’조의 말미에서, “진나라・수나라 시대에 해동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구도한 이는 드물었고, 설령 있었다고 해도 아직 크게 떨치지는 못했는데, 원광 이후에는 뒤를 이어 서쪽 중국으로 유학하는 이가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바로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원광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이로 보아 원광에 대한 평가가 8~9세기 신라 당대의 불교계와 고려시대인 불교계, 특히 13세기 일연 사이에 상당한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원광에 대한 이러한 평가의 차이는 원광 한 인물에 대한 평가의 문제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크게는 신라불교와 고려불교의 차이에 대한 이해, 나아가 일연의 불교사인식을 추구할 과제를 우리에게 제기하는 것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원광의 행적을 전하는 자료를 시대순으로 열거하면, 중국 당 초기인 7세기 중반에 편찬된 도선(道宣)의 ‘속고승전’ 권13 의해편9 신라황륭사석원광전(新羅皇隆寺釋圓光傳), 11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본수이전(古本殊異傳)’에 실린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 권4 진평왕조와 권45 귀산전(貴山傳), 1215년에 찬술된 각훈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원광전, 13세기 편찬된 ‘삼국유사’ 권2 원광서학조 등 6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자료에 언급된 원광에 대한 사실들이 상호 보완하는 내용이 없지는 않으나, 그보다도 다르게 기록된 사실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출신가문과 생존연대, 출가 장소와 시기, 중국 유학의 동기와 시기, 귀국 이후의 활동 내용 등에서 완전히 다르게 기록된 것이 많아서 정확한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위에 열거한 자료 가운데 맨 마지막에 편찬된 ‘삼국유사’의 원광서학조에서는 기본자료로서 ‘속고승전’과 ‘고본수이전’의 원광전을 그대로 전재하고, 그밖에 ‘삼국사기’의 원광 관련 기사와 일연 자신이 운문사에서 직접 채집한 고문서로 추측되는 가서갑(嘉栖岬)의 점찰보(占察寶)에 관한 사실을 첨가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속고승전’과 ‘수이전’의 내용은 원광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하여 전혀 상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어서 원광의 생애와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커더란 어려움을 주고 있다. ‘삼국유사’의 찬자인 일연은 두 자료 내용의 차이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두 자료를 그대로 전재한 뒤에 그 전재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혀 주었다. “이상의 당나라와 우리나라 두 전기에 의하면, 다만 성씨가 박(朴)・설(薛)로 되고, 출가가 동(東, 필자:신라)과 서(西, 필자:중국)로 되어 마치 두 사람과 같아서 감히 자세히 단정할 수 없으므로 두 기록을 다 남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속고승전’의 판본은 고려대장경 함질(函帙)의 기호인 달함(達函)에 실려 있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으며, 또한 ‘고본수이전’도 동경(東京, 필자:경주)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고본(古本)에 실려 있는 것임을 분명히 기록하여 주었다. 오늘날 전하지 않는 ‘고본수이전’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일연의 편찬태도 덕분이다. 이로 보아 일연은 원광에 관한 자료들을 집대성하면서 각 자료의 차이점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을 경계하는 엄정한 자세를 견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연이 전승되는 자료에 대해 무조건 존중하는 무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아니다. 일연은 ‘속고승전’과 ‘수이전’ 내용을 그대로 잔재한 이유를 밝힌 다음에 이어 ‘해동고승전’의 원광전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고, 그 잘못 첨가된 내용을 삭제해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전기에는 모두 작갑(鵲岬)・이목(璃目)・운문(雲門)의 사적이 없는데, 향인(鄕人) 김척명(金陟明)이 그릇되게 항간의 설을 윤색하여 원광법사전을 짓고 운문사의 개산조(開山祖) 보양(寶壤)법사의 사적을 함부로 기록하여, 합쳐서 한 가지 전기를 만들었다. 뒤에 ‘해동고승전’을 지은 자가 그 잘못을 답습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그것에 미혹되었다. 따라서 여기에 (이것을) 분별하고자 한 글자도 가감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실은 것이다.” 그리고 일연은 보양・이목에 관한 사실은 원광의 전기에서 제외하여 원광서학조에 이어 ‘보양이목(寶壤梨木)’조를 별도로 설치하고 있었다. 

일연의 불교사인식과 서술자세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삼국유사’에서 판단을 보류하고 그대로 남겨준, ‘속고승전’과 ‘수이전’ 사이의 내용 차이를 해결해야 할 과제는 오늘날의 학자들이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좀 더 좁혀서 말하면 원광의 출생과 행적을 이해하는데, ‘속고승전’과 ‘수이전’의 내용은 서로 모순되어 쉽게 절충이 허용될 수 없는 성격이며, 두 자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제3의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에 결국 두 자료 가운데 어느 것을 신뢰하고 선택하는가에 따라 학계에서의 주장은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먼저 ‘수이전’의 자료적 가치를 더 신뢰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기백(李基白) 교수는 전적으로 ‘수이전’의 자료에 의거하여 원광의 불교를 무격적(巫覡的) 불교의 극복과 6두품 출신의 불교적 성격에 비중을 두는 해석을 제기하였다. 그것에 대해 신종원(辛鍾遠) 교수는 ‘속고승전’이 전기의 격식을 갖춘 것에 비해 ‘수이전’은 삽화(에피소드)의 형식을 취한 역사서로 평가하고, 원광의 행적은 ‘속고승전’에 의거해서 풀어나가되, 생애의 각 단계마다 ‘수이전’과 비교를 거쳐야 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속고승전’에 의거하여 중국 불교의 수용과정을 해명하는데 치중하고, ‘수이전’의 원광법사전에서는 그가 설씨라는 사항 말고는 취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기백 교수와 대치되는 측면에서 ‘속고승전’의 자료적 가치를 더욱 신뢰하는 입장에서 원광의 생애와 사상을 본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학자는 최연식(崔鈆植) 교수이다. ‘속고승전’(일명 唐高僧傳)은 당의 초기 사분율종의 승려 도선(596〜667)이 남북조의 후기로부터 당의 초기까지의 시기에 활약한 승려들의 전기를 기록한 책으로 모두 50권이다. 앞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정관 19년(645)까지의 승려 500인을 수록하였다고 하였지만, 실제는 인덕 2년(665)까지 20여 년에 걸쳐 증보하여 정전(正傳) 485인, 부전(附傳) 219인을 수록하였다. 한국 출신으로는 백제의 혜현(慧顯)과 신라의 원광과 자장 등 3인이 정전으로 포함되었다. 따라서 ‘속고승전’은 원광의 사후 가까운 시기에 찬술된 것이며, 더욱 원광전에 부전으로 수록된 원광의 제자인 원안(圓安)이 도선과 비슷한 시기에 당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특히 원광의 귀국 이후의 행적을 도선에게 전하여 인용된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그 사료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속고승전’에서의 원광 행적은 중국에서의 수학과정과 교화 내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귀국 이후의 교화 활약 내용도 비교적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인 자장의 경우도 당에의 유학 연도와 활동 내용으로 ‘속고승전’ 자장전의 기술이 가장 정확한 것이었다는 점은 자장에 관한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반면 ‘수이전’의 내용은 대부분 신비로운 설화적인 내용으로 채워지고, 중국에의 유학 사실은 간단히 넘기었다. ‘수이전’의 설화 배경의 지역이 삼기산(三岐山, 속칭 臂長山)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광의 부도가 있었던 금곡사(金谷寺)에서 민간의 전설로서 전승되어 오던 것이 ‘수이전’의 원광전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수이전’의 원광전은 산신의 영험함을 말하고, 그 산신의 보호를 받았다는 원광의 위대함을 전하고 싶은 염원을 반영한 설화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원광의 실제적 행적에 관한 사료로서의 가치는 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25호 / 2020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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