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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인의 불교의식과 범패

일본 불교의례, 당풍 들어오기 전 신라 범패 영향 받았다

히로시마대학 고바야시 교수 ‘가타카나’ 신라에서 유래 주장
근거로 도다이지 소장 신라 ‘화엄경’ 사경 글자와 각필 제시
엔닌 스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신라 범패 일본과 비슷”

산동적산원 전경.

얼마 전 일본 히로시마대학의 고바야시 요시노리 교수가 일본의 가타카나가 신라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여 한일 고문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7~8세기 일본에 전래된 신라의 불교경전 필사본에 발음과 뜻을 표시하기 위해 붙인 신라인의 각필을 근거로 들었다. 고바야시 교수는 나라의 도다이지에 소장되어 온 신라 ‘화엄경’ 사경을 복제한 자료를 펼쳐놓고 사경의 글자와 각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필자는 이 뉴스를 보면서 지난해(2019년) 여름 일본 범패(聲明)를 조사한 일과 2006년 산동적산원을 탐방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산동적산원에서 행해진 의례의 음악적 내용을 최초로 연구한 사람은 만당 이혜구(晩堂 李惠求, 1909~2010) 박사였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이혜구 박사는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해오다 비올라 연주자로 관현악단 생활을 하였고,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입사해 방송국 PD로 일하며 음악프로를 맡게 되었다. 이 프로에서 국악을 소개하게 되었는데 한국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자료를 찾아 공부하다 마침내 고악보 해독까지 하게 되었다. 1961년 한국음악에 대한 영어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유네스코 회의 참석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학술회의에 한국음악을 소개하였고, 서울대에 국악과를 만들어 한국음악학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 박사가 한국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당시의 국악은 장터의 패거리와 기생들이나 하는 음악이었다. 이러한 시절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된 음악적 내용을 읽고 ‘신라의 범패’라는 논문을 쓰게 되었고, 1957년에 펴낸 ‘한국음악연구’를 통해 인쇄되었다. 이 무렵은 공산국가인 중국과 왕래를 할 수 없었고, 범패에 대한 연구도 없었거니와 한국전통음악에 대한 연구의 바탕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 박사는 산동적산원의 신라인 범패를 일본 쇼묘에 견주어 추정하고, 한 스님과 대중이 겹치는 소리를 서양의 대위적 선율에 비추어 해석하기도 하였다.

손님을 맞이하는 적산원의 민간 악대.

그리고 약 50여년이 흐른 뒤에 필자에 의해 산동적산법화원의 현지 사정과 중국 불교의례, 한국의 범패에 견주어 ‘신라인의 범패’를 재조명하게 되었다. 그 사이 한국에도 불교의례의 전통이 많이 복구되어 7언 절구의 게송 중 앞의 4자를 짓고, 다섯 번째 자(字)의 선율로 넘어 갈 즈음 대중스님이 울력소리를 시작하며 겹치는 부분이 있어도 그것이 화성적 수직 구조를 이루는 서양음악과는 차원이 다름을 밝힌 논문을 써 헌정하였다. 이후 본 논문이 이혜구 박사 백수기념 논문집에 실렸으니 학자로서 가장 큰 영광과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이다. 지금은 관련 논문 수편이 ‘한·중 불교음악연구’에 실려 출판되어 있지만 이러한 내용을 국내에서 처음 발표할 때의 일들을 생각해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우선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된 신라인의 불교의식을 보면, 스님이 입장하고 퇴장할 때 대중이 다 함께 노래하고, 경전을 설하기 전에 법좌의 스님이 경의 제목을 길게 늘여 노래한다. 그리고 이에 응답하여 하좌(下座)에 있던 한 스님이 당풍의 범패를 노래하고, 의례가 진행 되는 가운데 대중이 수시로 다 같이 노래를 하는 모습이 오늘날 한국의 불교신행과는 너무도 달랐다. 이러한 내용을 대만 불교의식과 범패에 비추어 발표하니 “범패는 스님이 하는 것인데 대중이 함께 부르는 것을 어찌 범패라고 할 수 있느냐?” “스님과 대중이 주고받거나 함께하는 것은 가톨릭 미사나 개신교 음악을 모방한 것이므로 연구 가치가 없다” “설사 그런 의식과 음악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음악형식의 문제이지 선율성격과 상관없다”고 했다. 

장보고 기념탑.

2006년 10월 어느날, 신라인의 범패를 느껴보고자 장보고의 뱃길을 따라 산동적산원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저녁 무렵 인천 선착장엘 가니 온 사방에 보따리 장사들이 물건을 포장하느라 테이프 떼는 소리가 귀를 찢는 듯하였다. 뱃고동이 울리고 항구를 떠나자 캄캄한 바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신라인들의 뱃길을 따라 가는 설레임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적산원 포구에 닿아 배에서 내리니 젓갈 냄새가 확 다가와 “이곳이 신라인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 맞긴 맞나보다”하는 생각에 그 비릿한 냄새가 그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넓은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길게 줄세워져 있고, 그 곳을 지나 도량 곳곳을 둘러보니 복원된 지 얼마 안 된 적산원 가람이 다소 생경스럽게 다가왔다. 기념관이며 박물관 자료들을 둘러보니 복원이 있기까지 장보고기념사업회를 비롯한 학계의 노력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연구 성과로 ‘해신’과 같은 드라마가 가능하였음을 생각하니 선학의 고마움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복원의 한계가 곳곳에서 느껴져 아쉬운 마음도 피할 수 없었다. 

종루에는 중국식 종이 걸려있고, 사원을 오가는 스님들은 중국식 황색 법의를 입었다. 붉은 옷에 노란 띠를 두르고 요란하게 북을 치며 관광객을 맞이하는 현지인에게서 혁명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사원 정문에는 8월12일부터 19일까지 행했던 제2회 수륙재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대개 8일에 걸쳐 행하는 중국 쉐루파회(水陸法會)가 느껴져 그야말로 산동적산법화원은 한국인을 불러들이기 위한 관광지라면 모를까 장보고와 신라방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법화원 입구.

백견이불여일독(百見而不如一讀)이라, 엔닌 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836년 무렵 산동적산법화원에는 24명의 스님과 3명의 사미니, 2명의 노인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 년에 500석을 수확할 수 있는 장전(庄田)이 있었다. 당시 이곳에 있던 신라인들은 신라 통일에서 밀려난 고구려, 백제의 유민, 발해인까지 그 출신이 다양하였다. 당시 당나라에는 불교 탄압이 극심하였던 때였으므로 장보고와 신라인들은 잠입해 있던 엔닌을 숨겨주며 구법활동을 도왔다. 이를 위해 오늘날 비자와 같은 공험(公險)을 취득하게 하는 등 엔닌의 구법활동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엔닌은 이곳을 수차례 오가면서 839년 11월16일에 강경의식을, 11월22일 이후 일일강의식과 송경의식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대중이 부르는 범패는 신라음으로 당풍과는 다르고 일본과 비슷하다(大衆同音 稱歎佛名 音曲一依新羅音 不此唐音...音勢頗似本國)”는 기록을 남겼다. 신라음과 비슷하였다는 그 흔적을 찾아 오늘날 일본의 불교의식과 범패에 대해 조사를 해 보니, 한 결 같이 하는 말이 “현재의 일본 범패(소묘 聲明)는 엔닌 이후에 시작된 당풍범패가 실질적인 출발”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네 역사서에는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범패를 배워 와서 가르친 후 신라 전역에 퍼졌다”는 내용이 전부이지만 일본 기록에는 “엔닌 스님이 당나라에서 배워온 범패를 종류별로 나누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과 함께 해당 악곡명이 적시되어 있다. 그리하여 엔닌으로 인해 형성된 일본 쇼묘가 불리는 불교의식을 조사해 보니 대표적인 것이 시카호요(四箇法要)였다. 패(唄), 산화(散華), 범음(梵音), 석장(錫杖)으로 대별되는 범패가 불리는 시카호요는 오늘날 덴다이쇼묘(天台聲明)의 핵심 의례로써 엔닌이 가르친 범패악곡을 담고 있다.

장보고기념관에 전시된 그림 ‘엔닌 스님 일행을 맞이하는 장보고와 신라의 스님’.

그런데 이 방면 일본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시카호요의 가장 오래되고 장중하였던 법요로 덴보쇼오(天平勝宝) 4년(752)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개안회(大佛開眼會)’를 꼽았다. 당시 도다이지 법요에는 고켄(孝謙) 천황과 쇼무태상 천황, 고묘(光明) 황후가 참석한 가운데 출임(出仕)한 스님이 약 일 만명이었다. 여기서 출임한 스님라면 단순히 법회에 동참한 것이 아니다. 그 기록을 좀 더 들여다보니 패사(唄師) 10명, 산화사(散華師) 10명, 범음승(梵音僧) 200명, 석장승(錫杖僧) 200명이 참여했다. 패사 1명 예하에 수십명 내지 수백명의 어산스님이 있었고, 산화사가 10명이면 산화를 하는 스님이 10팀이므로 그 예하에 얼마나 많은 스님이 있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천황이 보는 앞에서 일만명의 스님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의례가 체계적으로 잘 짜여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풍 범패가 들어오기 전의 일본 불교의례와 율조에 끼친 신라의 불교의식과 음악이 얼마나 장엄하고 방대하였을지 이 또한 추정하게 된다. 이때가 고바야시 교수가 근거로 든 7~8세기 일본에 전래된 신라 불교였고, 불교경전 필사본에 발음의 성조를 표시하기 위해 붙인 각필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일본의 쇼묘는 궁중아악과 결합하여 범패의 악조이론이 정교하게 형성된 반면, 한국은 조선조에 궁중에서 쫓겨나와 민간주도로 진행되는 바람에 악조이론은커녕 민요나 무속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네 범패를 들어보면 각 지역의 민요토리를 닮아 있다. 그러나 현재 전승되고 있는 궁중악과 범패를 유심히 들어보면 서로 닮은 특정한 가락도 있어 고바야시 교수의 논문과 함께 신라의 소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진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25호 / 2020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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