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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상(相)

기자명 현진 스님

흔히 ‘자만심’으로 이해하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달라 

금강경에 나오는 ‘상’의 개념
생각·징후·가늠새 의미 담아
해탈 이전 인간은 이해 못해
구마라집 스님, 相으로 번역

‘금강경’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 실생활에 이미 정착해 있는 ‘상(相)’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너는 어째 상(相)이 너무 높은 것 같아~”라거나 “너는 그 상(相)만 버리면 나무랄 데가 없는데…”라는 등의 표현으로 접할 수 있다. 이때의 상은 거의 자만심(自慢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너는 어째 자만심이 너무 쎈 것 같아~”라는 의미로서….

‘금강경’의 제3 대승정종분 말미에 상(相)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수보리가 “어떻게 해야 마음을 잘 안정시켜 확실히 장악할 수 있습니까?”라고 여쭙자 부처님께서 “대승수행자라면 일체 모든 중생들을 다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되, 설령 다 제도하였더라도 제도했다는 생각조차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대승수행자에게 4상(四相)이 남아있다면 이미 대승수행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답하신 부분에서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으로 널리 알려진 4상(四相)을 언급하기에 앞서, 우선 상(相)이란 글자에 대해 살펴보자. 구마라집역[羅什譯]을 기준으로 상(相)이라 언급된 것은 범어본(梵語本)엔 산즈냐(saṁjñā, 산냐, 생각)와 락샤나(lakṣaṇa, 모양, 징후) 및 니밋따(nimitta, 가늠, 가늠새)의 세 단어로 나뉘어져있다. 그것을 현장 스님은 산즈냐를 상(想)이라 옮기고 나머지 둘을 동일한 상(相)으로 옮긴 데 반해, 구마라집 스님은 셋 모두를 상(相)이라는 한 단어로 옮겨버렸다. ‘금강경’에서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를 다른 유사 단어와 구분하지 않고 옮긴 덕분에 혼란을 야기한 구마라집역은, 그래서 더 절묘한 번역이란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락샤나(lakṣaṇa)는 ‘감지(√lakṣ)된 것(­ana)’이란 말로서, 어떤 무엇이 내면적으로 변화하면 그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인 모습을 가리킨다. 인도전통에서 어떤 이가 성인이 되면 신체에 생기는 각종 변화, 즉 성불하면 갖게 되는 32상(相)을 일컬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뜻 옮김 하자면 징후(徵候) 정도가 될 것이다. 니미따(nimitta)는 ‘섬세히(ni­) 가늠(√mi)된 것(­ta)’이란 말로서, 어떤 무엇을 의식적으로 분류하고 자세히 가늠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결론을 가리킨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고자할 때 이해득실을 따지고 효과나 영향 등을 고려한 뒤에 어떻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즉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도달하게 되는 어떤 결론을 일컬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뜻 옮김 하자면 가늠 혹은 가늠 되어진 모양새란 의미의 가늠새 정도가 될 것이다.

산즈냐(saṁjñā)는 ‘더불어(saṁ) 알다(√jñā)’란 말로서, 무엇을 알 때 있는 그대로 똑바로 알지 못하고 예전의 경험이나 기억을 불러와서 그것에 의지하여 그것을 짐작하고 추측하여 불완전하게 앎을 가리킨다. 산즈냐는 빠알리어인 산냐(saññā)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반대말이 지혜(智慧)로 번역되며 무엇을 있는 그대로 눈앞에 놓고 본 듯이 안다는 의미의 쁘라즈냐(prajñā), 즉 반야(般若)이다. 구마라집 스님이 산즈냐를 상(相)으로 번역한 것은, 한문의 문자학에서 상(相)은 ‘눈[目]으로만 대충 보아서 나무[木]를 고르다’라는 어원을 지닌 글자임에 근거한 것이기에 현장 스님의 상(想)이란 번역보다 더 의미 있는 옮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산즈냐를 상(相)이나 상(想)으로 그냥 놓아두지 않고 굳이 우리 글로 옮겨본다면 ‘생각’ 정도가 적당할 듯싶다. 해탈하기 이전의 인간은 어차피 불완전체이기에 무엇을 어찌 생각하듯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 또한 불완전할 것이니, 그저 알음알이에 의지하여 짐작하고 추측하고는 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산즈냐’와 ‘생각’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어려운 교리를 담고 있는 이런저런 용어들이 즐비한 ‘금강경’을 언급하려는 마당에 겨우 초입부에서 상(相, saṁjñā)이란 한 글자에 글이 너무 지체되는 듯하나, 상(相)이나 보살(菩薩) 등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지 않고는…. 어쩌면 그래서 ‘금강경’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이처럼 간략하게라도 상(相)을 살펴보니 그것이 자만심이란 의미가 아닌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25 / 2020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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