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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김명국의 화선일미(畵禪一味), 달마도-하

기자명 주수완

형태 떠나 존재 못 하지만 파괴할 때 존재하는 미술

‘파격’ ‘격식 파괴’라는 말 어울리는 그림, 김명국의 달마도
달마 그린 것은 맞지만 달마 겉모양 그리려고 한 것은 아냐
달마 추구한 언어 넘어 직관적 사유 통한 깨달음 표현한 것

김병종 화백의 ‘바보예수: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 1985년.

이제 본격적으로 김명국의 ‘달마도’를 살펴볼 차례이다. 달마대사를 그렸다고는 하지만, 그 필선은 아주 간략하고, 어떻게 보면 몇 가닥의 기괴한 선으로 이루어진 덩어리처럼 보일 뿐이다. 달마를 그린 것이라고 하니까 달마로 보는 것이지, 만약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갑자기 들이민다면 이것이 과연 무엇을 그린 것인지 고민 좀 해봐야할 것 같다. ‘달마’를 버리고 보면 눈덮인 산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파도, 혹은 바위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거기다 현대의 미술작품들이 테크닉이나 정교함이라는 것은 마치 한물 간 옛 미술의 잔재로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달마도’ 역시 사실적으로 잘 그리려고 하는 의도 따위는 저만치 치워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파격’, 즉 ‘격식을 파괴한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그런 그림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런 파격을 발견한다면 설령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아, 뭔가 대단한 예술성이 있는가 보다”라고 끄덕이고 넘어가 줄 수는 있어도, 전통회화에서 파격이 보이면 그것은 그리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원래 수묵화로는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이 정도 밖에 그리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말하자면 “동양화는 원래 그런 것 아닌가”라고 매우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미술에서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고정적 형태를 벗어난 추상미술이 등장했다면 동양미술에서는 그 개념이 훨씬 더 일찍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파격을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특히나 ‘달마도’의 경우는 그 파격의 소재가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라는 점에서 더더욱 특별하다.

달마대사가 누구신가? 달마께서 창시한 선종은 이전의 불교가 경전의 문구에 사로잡혀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대신 또 다른 구속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고 참선을 중심으로 하는 직관적 깨달음을 주장한 새로운 불교였다. 경전의 틀이라는 것은 결국 언어다. 인간의 사고를 정리하고 표현하는 것이 언어이지만, 이 언어는 다시금 인간의 사고에 일정한 규범을 만들면서 사고가 그 언어적 틀 안에서만 작동하도록 제한한다. 언어는 소통에 있어 필수적이지만, 대신 그 언어는 사고를 구속하고야 만다. 그런데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우리의 사고가 늘 사회적 약속 안에서만 작동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자유로운 사고 대신 언어의 틀 안에 갇힌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달마대사의 생각이셨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비판은 비단 불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종교마다 극단적인 수행으로써 “묵언”이라는 것이 있다. 불교의 “묵언수행”은 널리 알려져 있다. 왜 묵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다보면 우리는 생각을 언어적으로 하는 대신 보다 직관적으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선지식들이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 반대로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언어적으로 보는 것이다. 종교 수행의 기초는 그 언어를 파괴하고 깨뜨리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보아도, 부처님은 언어적으로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다. “달을 보라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고 있는가”는 ‘능엄경’의 유명한 문구에서 손가락은 경전, 즉 언어를 의미한다. 부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언어에 갇히지 않기 위해 이런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 ‘견지망월(見指忘月)’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언어가 나쁘다거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쩌면 이 비유의 초점은 인간은 결국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부처님조차도 언어적으로 설법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음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핵심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에 갇히지 말라는 것이다. 언어는 마치 음식과 같아서 필요하지만 구속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일 뿐이었다.
 

김명국 ‘달마도’, 국립중앙박물관, 1636년 혹은 1643년.

그런데 사실상 예술이 지향하는 바도 이러한 개념과 전혀 다르지 않다. 시(詩)를 보자. 시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는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언어, 엄밀하게는 언어가 지니는 틀에 갇히지 않았다. 시가 언어에 갇힌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평범한 말일 뿐이다. 그리고 미술도 마찬가지다. 시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는 것처럼, 미술 역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 표현하지 않고 여러 사물에 빗대어 표현한다. 미술 속의 나무나 꽃 역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간접적 도구일 뿐이다. 우리가 그 나무와 꽃에 숨겨진 작가의 감정을 읽지 않고, 그저 나무와 꽃으로만 본다면, 그것이 바로 달을 보라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다시 ‘달마도’를 보자. 이 그림은 달마를 그린 것인가? 달마를 그린 것은 맞지만, 달마의 겉모습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달마가 추구한 언어를 넘어선 직관적인 사유를 통한 깨달음 그 자체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형태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달마가 언어를 파괴했다면, 김명국은 그림에서 형태를 파괴했다. 형태는 미술의 언어다. 미술은 형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 형태를 파괴해야 미술이 된다.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과 선(禪), 예술과 선의 지향점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석가모니와 달마의 가르침은 비단 불교나 불교예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양의 문화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으며, 마치 김병종 화백의 ‘바보 예수’ 시리즈에서처럼 종교를 초월한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oi, Eloi, lama sabachthani, 나의 하나님, 왜 나를 저버리시나이까)”라며 인간구원을 위해 절규하는, 그렇게 사랑 밖에 모르는 “바보 예수”의 핵심만을 추려 묘사한 이 작품을 보며 그 안에서 김명국과 달마를 찾는다면, 정말 그것은 너무 어긋난 생각일까?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25 / 2020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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