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봉국사 주지 현근 스님
정릉 봉국사 주지 현근 스님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20.02.24 13:59
  • 호수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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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리 길 걸어 출가한 어린 행자, 조계사 일대 성역화를 꿈꾸다

이른 새벽 거침없이 걷는
스님 보고 출가원력 세워

무정히 돌아섰던 어머니
불제자임을 인정했던 것

은사 철웅 스님 고훈
“거짓 없고 부지런해라”

“비가 새도 전각 안 짓고
도량 확장에 매진” 서원

조계사 땅 한 평 늘 때마다
신도 신심도 더불어 증진

템플스테이·국제선센터 
부지 등 50필지 땅 매입

“이번 생에 못다 한 불사
다음 생에 하면 돼!”
봉국사 주지 현근 스님은 ‘거짓 없고 부지런해라’는 은사 철웅 스님이 전한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 애쓰며 살아왔다”고 술회했다.

‘막막한 세상의 끝/ 천지에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홀로/ 돌담을 마주하고 선다/ 조용히 돌거울을 들여다보면/ 거기 내가 길이 되어 누워있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한 줄기/ 길이 되어 외롭게 누워있다.’(김영석 시 ‘돌담’ 전문)

가끔, 새벽녘에 일어나 담 너머를 우두커니 바라보곤 했다. 마을 제일의 부호로 소문난 집안이었지만 아버지가 별세한 직후부터 살림은 급격히 줄어들어 갔다. 이 형편대로라면 7남매의 막내인 자신에게 돌아올 몫은 고사하고 중·고등학교 입학도 장담할 수 없을 듯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 그 걱정, 그 근심이 두 어깨를 내리 누른 지 벌써 1년이다.

먼 산을 넘어오는 여명을 좇다가 마을길에 시선이 닿았다. 한 사내가 홀로 걸어가고 있다. 단호한 걸음걸이는 태산이라도 걷어 찰 태세다. 보폭만큼 흩날리는 장삼자락은 가슴팍으로 밀려오는 새벽공기마저 단숨에 밀어버릴 기세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그 사람, 삽시간에 뇌리 속으로 압인됐다. 형수에게 물어 누구인지 알아냈다. 어머니 첫째 남동생의 아들이었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출가한 스님이었다. 

그 암자로 편지를 띄웠다.

‘거기 가면 공부할 수 있나요?’ 

답신이 날아들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 준다.’ 
 

현근 스님의 원력은 ‘조계사 성역화’ 불사로 이어졌다. 조계사 제공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봄기운이 온 대지 위로 피어오를 즈음의 이른 아침 홀로 집을 나왔다. 경남 창원에서 김해 진영역까지 10리 길을 걸은 후 양산 물금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물금역에 내려서는 통도사까지 이어지는 60리 길을 또 걸었다. 머리, 어깨에서 솟은 땀이 등줄기를 따라 폭포수처럼 쏟아졌지만, 자신의 꿈이 절에서 실현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던 터라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밤 9시 일주문으로 들어서는 사내아이를 달과 별들이 마중해 주었다.  

극락암에는 근현대 대표 선지식으로 손꼽히는 경봉·철웅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사제인연은 철웅 스님과 맺어졌다. 은사스님의 지도 아래 ‘천자문’과 ‘초발심자경문’ ‘금강경’을 외웠고, ‘선요’ ‘서장’도 새겼다. 행자가 견뎌야 할 고달픔이 있었지만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떠올려도 뿌듯했다. 1년여쯤 지났을까! 저녁 공양 준비 차 보리쌀을 채에 일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여기, 전병열이 있는기요?”

고개를 들어 보았다.

“여기 있다 켔는데… 어디 있는기요?”

세간과 출세간의 삶은 그렇게 결이 다른 거였다. 행자인 줄은 알아도, 아들인 줄은 모를 만큼, 버스 멀미가 심한 어머니였으니 자신이 걸어왔던 그 길을 그대로 걸어왔을 터다. 그것도 머리에 쌀을 인채로 말이다.  

“힘들게 쌀은 와 이고와요?”
“네가 먹을 쌀을 내가 먹으면 되겠나!”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귀가할 채비를 서둘렀다. 철웅 스님이 행자를 불렀다.

“저 느티나무까지만 배웅해 드려라.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으면 내 상좌 안 한다!”

거역해서는 안 될 엄격함을 직감했다.

암자에서 느티나무까지는 100여 걸음. 

“살펴 가이소.”
“그래, 들어가라.”

느티나무에 기댄 채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번쯤은 뒤돌아 봐 주시겠지!’ 

찰나의 눈길도 건네지 않은 어머니는 산허리를 돌아 사라졌다.  
 

현근 스님은 정릉 봉국사를 중창했다.

은사스님의 매정함 한 덩어리, 어머니의 무정함 한 움큼. 어린 행자는 꾸역꾸역 삼켰다. 삭발할 때도 설핏했던 ‘출가’ 두 글자가 뇌리에 또렷하게 박혔을 터다. ‘현근’이라는 법명과 함께 ‘길이 되어 외롭게 누워’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한 것도 그 때일 것이다.

선객이었던 은사스님은 짬만 나면 상좌를 방석 위에 앉혔고 상좌는 금새 졸았다. 결코 깨우는 법이 없었는데, 눈 뜬 상좌를 향해 툭 던진 한 마디는 간결하면서도 자비가 넘쳐흘렀다.

“다 잤느냐!” 

참선보다는 교학에 목말라하는 상좌를 고봉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청암사로 보내주었다. 

사집을 뗀 후 범어사 강원으로 옮겨 사교와 대교를 마쳤다. 극락암에서 3년을 보내며 은사스님으로부터 기본교육을 받았던 덕에 교학문리를 빠르게 터득해갔다. 사교 과정을 밟으며 사집반 강의를 할 정도였다. 범어사강원 졸업 후 범어사 중강을 맡았던 현근 스님은 부산 동래포교당 주지 소임을 시작으로 포교에 매진했다. 

1986년 정릉 봉국사에 머물고 있을 때 함박눈이 내리는 이른 새벽 조계종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 찾아왔다.

“현근 스님, 조계사 주지를 맡아 주시오!”

1972년 3월부터 1975년 3월까지 만 3년 동안을 조계사 부주지 소임을 맡았던 현근 스님은 마음 한 자락이 늘 편치 않았다. 조계종 총본산이라는 상징에 비해 사격이 낮아도 너무 낮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번듯한 일주문도 없는 입구는 택시 한 대 간신히 들어오는 정도에 불과했다. 큰 건물이라고 해봐야 대웅전과 총무원이 다였던 그 당시 조계사 땅은 4300m²(약 1300평). 그 언젠가 조계사 주지가 된다면 ‘도량만큼은 한껏 넓혀보겠다’는 원력을 세웠더랬다.

“조계사 주지, 맡겠습니다!”

윤보선 조카의 집을 내놓을 것이라는 소식에 당장 달려갔다. 당시 총무원 뒤편의 한옥도 형편 닿는 대로 모조리 거둬들였다. 가정집이든 음식점이든 승복집이든 내놓겠다는 의사만 보이면 어떻게 해서든 정재를 마련했다. 조계사 주지직을 놓았던 1998년 12월24일까지도 옛 상운중심 (현 일주문 옆 주차장 위치) 경매에 참여 해 낙찰조치까지 해놓았던 현근 스님이다. 현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포함 해 극락전, 범종루, 세존사리탑, 기도접수처,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선상 안의 공간 상당 부분은 현근 스님이 확보한 것이다. 그뿐인가. 조계사불교대학 건물을 비롯해 조계사 앞 템플스테이통합정보센터, 서울 목동 국제선센터 부지까지 매입했다. 조계사 주지 재임동안 사들인 부지만도 50필지에 이른다고 한다. 

불자와 시민이 함께 호흡하는 지금의 품 넓은 조계사를 태동시킨 ‘조계종 총본산 성역화 불사 추진위원회’가 발족한 건 2014년 11월이다. 그 서막은 현근 스님이 조계사 주지로 부임한 1986년에 올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계종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쓴 ‘조계사 사적비’에도 현근 스님의 공로가 명료히 새겨져 있다. 

조계사 주지로 부임했을 때의 소회를 부탁드렸다.

“조계사 대웅전을 참배하며 부처님께 서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처님. 비가 새더라도 당분간 대웅전은 짓지 않겠습니다. 저는 부동산을 매입하여 도량을 확장하겠습니다.’ 

전각불사는 훗날 인연 닿는 스님이 일으키면 된다고 보았습니다. 제가 지은 건 수송공원 쪽의 범종루와 지금의 극락전이 전부입니다. 조계사와 수송공원 사이에는 길이 나 있습니다. 그 방향으로의 진출은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했기에 건축불사를 단행했던 겁니다.”
 

현근 스님의 공로는 조계사 사적비에도 새겨져 있다. 조계사 제공

조계사 대웅전 삼존불은 2006년 11월 봉안했다. 창건 당시부터 70년 가까이 대웅전을 지켜온 부처님은 아담하면서도 고아한 목조석가모니불(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26호)이다. 지금은 수미단 오른쪽 아래에 앉아 계신다. 현근 스님도 대웅전에 큰 부처님을 모시려는 생각을 했지만 사연을 알고는 이내 접었다고 한다.

“조계사 창건 당시 큰스님들은 불교중흥을 위해 어느 부처님을 모실 것인지 의견을 나눴습니다. 그 결과 월출산 도갑사 부처님을 모셔오기로 결정하고 이운해 봉안했습니다. 주지 독단으로 진행할 불사가 아니었습니다. 조계사 사부대중은 물론 종단 차원의 공감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대작불사였습니다.”

불사추진에 따른 세심함과 철저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자 조계사에 내포된 상징이 그만큼 지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36년 당시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로 죽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博文寺)를 총본산으로 지정하고 한국불교를 완전히 장악하려 했습니다. 대한독립을 염원하고 있던 스님들이 용납할리 없습니다. 동학정신을 계승한 보천교의 십일전(十一殿)을 이전해 와 1938년 10월 대웅전을 낙성했습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전국승려대회, 1950년대의 정화불사, 1960년대의 통합종단 출범, 1994년의 종단개혁을 지켜보았던 조계사입니다. 근현대 불교사가 응축된 역사의 현장이자 한국불교의 심장부입니다.”

땅 한 평이 늘 때마다 조계사 신도들의 신심도 두터워졌다. 기도객은 물론 대덕고승의 법문에 귀 기울이려는 신도들이 급증했고, 외국인 관광객도 격증했다. 그러고 보면 1980년대 초반의 조계사와 1990년대의 조계사는 공간·신행적으로 완전히 다른 도량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쉬이 전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만의 큰 원력을 품었다고 술회했다. 지금의 조계종 중앙신도회관 부근부터 두산 위브를 거쳐 삼성플라자 부근의 종각역에 이르는 우정국로 일대를 조계사 도량으로 조성해 보자는 당찬 포부였다. 

“종로 한 복판에 조성한 불교마을!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지 않습니까!” 

‘총본산 조계사 성역화불사’는 한창 진행 중이다. 이미 담소, 선재어린이집, 관음전, 승소, 안심당 구역까지 대폭 확대돼 명실상부한 본사로서의 사격을 갖춰가고 있다. 조계사가 안은 땅만 해도 1만6000m² (약 5000평)를 넘어섰다. 현근 스님 주지 취임 때와 비교하면 공간이 5배로 늘어 난 것이다.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은 현근 스님이 확보한 것이다.

“조계종 전 총무원장이셨던 지관 스님과 자승 스님의 원력이 빚어낸 쾌거입니다. 조계종사에 길이 남을 업적입니다. 특히 자승 스님은 위례 신도시와 세종시에도 지역포교와 불교의 미래를 담보할 부지를 확보해 놓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우정국로 일대 성역화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을 법했다.

“이번 생에 못 했으면 다음 생에 하면 됩니다!”

현근 스님의 저 큰 원력을 품게 하고 실현시켜 갔던 힘은 언제 축적된 것일까? 초등학교 졸업 직후 집을 떠나 70리 길을 걸었던 기백만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혹, 은사 스님이 전한 고훈(高訓)을 실천하며 쌓아온 내공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은사 스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 없고 부지런해라!’ 그대로 따르려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조계사 대웅전 전면의 주련이 오늘도 빛날 수 있는 연유를 알겠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바다 밑을 태우고/ 바람이 수미산을 거꾸러뜨려도/ 진실로 적멸은 즐거움이니 열반의 모습도 이와 같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현근 스님은
철웅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현근 스님은 1962년 통도사에서 경봉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8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조계사, 구연사, 보광사 주지 소임을 보았으며 8·9·10·11·12·15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현재 해외특별교구장과 정릉 봉국사 주지를 맡고 있다.

 

[1526 / 2020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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