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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작가미상의 ‘오명항 초상’

기자명 손태호

임금·정승도 어쩌지 못한 조선 초상화의 정직함

화려한 옷 대조적으로 검은 낯빛, 얼굴 전면 덮은 곰보자국
검은 얼굴 간경변증·곰보자국 어릴적 생사고비 넘겼음 유추
모든 병 원인 알면 치료법 개발…신종바이러스도 이겨낼 것

작자미상 ‘오명항 초상’, 비단채색, 51.2×39.5cm, 1728년, 일본 텐리대학 도서관 소장.

중국 우한이란 도시에서 시작된 신종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 없이 환자가 발생하여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 접촉했던 사람들도 모두 격리되며 방문했던 장소는 봉쇄되는 등 전염병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언론에서는 실시간으로 각국의 환자발생과 대응을 보도하고 있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사망자와 감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부는 중국 위험지역에 방문한 모든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제주도 무사증 방문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중국인들이 마스크를 싹쓸이해서 구하지 못한다는 둥, 어떤 환자가 감염 사실을 숨기고 잠적했다는 둥 확인되지 않은 루머까지 돌며 공포를 극대화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신종 전염병은 이전 사스나 메르스 때보다 사망률이 낮아 치료만 제때 받으면 크게 위험하진 않다고 합니다. 위험성으로만 보자면 올 겨울 미국에서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1만명을 넘었다고 하니 새로운 질병이라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인류를 공포로 떨게 만들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시대에는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생명을 잃는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서양과 중국에서는 흑사병으로 큰 고통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 기근에다가 전염병까지 자주 급습하여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전염병 중에서도 조선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한 질병은 두창(천연두)이었습니다. 

두창은 먼저 심한 열이 나면서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고름이 차고 나중에 딱지가 떨어지면서 흉터를 남깁니다. 그래서 두창을 앓고 다행히 회복된다 해도 평생 흉터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 두창 흉터, 일명 곰보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초상화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명항 초상’은 특히 곰보자국이 가장 선명히 남아 있는 작품입니다.

오명항(吳命恒, 1673~1728)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 호는 모암, 영모당으로 소론에 속한 인물로 이조좌랑과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습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사직했으나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이조, 병조 판서를 지냈습니다. 다음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의금부판사 및 사도도순무사로 반란을 진압하여 분무공신으로 책봉됩니다. 위 초상화는 1728년에 그린 시복본(時服本)으로 시복을 입고 관모를 쓴 모습입니다. 그러나 화려한 분홍빛 옷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검은 얼굴, 얼굴 전면을 덥고 있는 곰보자국이 먼저 눈에 들어와 그동안 익숙한 위엄 있는 모습의 초상화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오명항 초상’ 얼굴 부분.

조선시대 회화 중 얼굴빛이 검게 보이는 작품이 종종 있는데 이는 물감의 변색으로 생긴 현상이지만 이 작품은 변색이 아니라 원래부터 검게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을 검토한 피부과 전문의는 얼굴이 검은 이유가 간경변증의 말기 증상인 흑색황달(黑色黃疸)이라고 밝혔습니다. 즉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모습이란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명항은 작품이 그려진 해에 사망하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부분은 얼굴 전체에 남은 곰보자국입니다. 그가 어릴 적 얼마나 힘든 생사의 고비를 넘겼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두창이 얼마나 무서운 질병이었는지 ‘조선왕조실록’에만 50여 회가 등장합니다. 실록은 한양을 비롯한 경기도에 크게 유행한 것과 전국적으로 대유행한 경우만 기록된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휠씬 자주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창은 치명율이 15~40%인대두창과 치명율이 1% 미만인 소두창이 있는데 조선에 소두창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발명 후 사망률이 높았던 것으로 보아 대두창이 자주 유행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일제강점기 통감부 기록이나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왕실의 사망률이 18~32%에 이르렀다니 민간은 말할 것도 없이 참혹한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현재 한국인 사망의 원인 대부분이 심장마비나 암 같은 질병이지만, 조선후기 사망 원인 1위는 두창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두창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두창이 이렇게 오랫동안 유행되었으나 이 원인을 임신기에 태중에서 더러운 액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믿었기에 누구나 피할 수 없고 한번쯤 걸리는 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해서 제대로 된 치료법이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천재 중 한 명인 다산 정약용도 ‘의령(醫零)’이란 의학서에서 두창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두더지 즙이나 삶은 달걀을 분에 빠트려 우수(雨水)에 먹으면 태원의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다소 비과학적인 방법을 주장했을 정도입니다. 물론 정약용은 나중에 인두법과 우두법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두창 퇴치에 크게 공헌하게 됩니다. 민간에서는 대부분 굿이나 두신(痘神)에 대한 제사 등으로 피해를 막아보려 했습니다. 

이처럼 임금, 사대부뿐 아니라 조선시대 모든 부모의 최대 관심사는 두창으로부터 자식을 지키는 것이며, 결국 그러한 노력은 18세기 말 중국에서 들여온 인두법과 우두법을 통해 서서히 효과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부터 지석영 등의 노력으로 우두접종이 보급되고 20세기 초 강제접종으로 1959년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퇴치에 성공합니다. 이처럼 모든 병은 그 원인을 알면 치료법도 개발되고 결국 인류는 그 병의 도전에서 승리를 하는 역사적 과정을 겪어 왔습니다. 

두창이 무서운 점은 살아남은 사람도 무서운 흉터가 남는다는 점입니다. 태조 이성계 어진에도 곰보자국이 있는 등 이런 흉터는 많은 초상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은 초상화의 주인공이 임금이든, 정승이든 곰보자국이나 사팔, 피부병, 황달까지 숨김없이 그려놓는 무서우리만큼 정직하고 원칙에 충실한 나라였습니다. 

공포를 확산하는 가짜뉴스는 전염병 퇴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감염자에 대한 혐오, 인종차별, 감정적인 외교 등은 향후 더 큰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아무쪼록 세계에서 알아주는 성숙한 민주국가답게 민관이 힘을 합쳐 전염병으로부터 소중한 가족을 잃지 않도록 지혜와 힘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26 / 2020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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