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자신이 창안한 정간보에 불교이념 담았다”
“세종은 자신이 창안한 정간보에 불교이념 담았다”
  • 이재형 기자
  • 승인 2020.02.28 11:04
  • 호수 15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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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희 위덕대 연구교수 분석
장단 음가 살린 획기적 악보
장단 중시는 우리말·범어 특징
32간은 부처님 덕상에서 착안
세종, 음악 기록인 악학궤범에
한글조사 붙인 찬불가도 수록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는 서양의 오선보처럼 음의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다. 사진은 세종이 만든 32정간.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는 서양의 오선보처럼 음의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다. 사진은 세종이 만든 32정간.

음악을 정치와 교육에 적극 활용했던 중국은 음악이론과 음률 산정방식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정작 소리의 길이와 높이를 표기할 수 있는 악보는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井間譜)가 처음이다. 중국을 능가하는 기보체계인 정간보에 대한 그간의 학술 논의는 천편일률적으로 성리학이나 음양오행 관점에서 이뤄졌다.

이런 가운데 우리 언어에 잠재된 리듬이 불경과 범문(梵文)을 만나 음악적 실용성을 갖춘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인 정간보 창제로 이어졌다는 획기적인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세종·세조 때 궁중악을 기록한 ‘악학궤범’에 새로 창제된 한글 조사를 붙인 찬불가가 수록됐음도 처음으로 밝혔다. 이는 호불(好佛) 임금인 세종의 한글 창제에 불교계가 적극 도왔다는 근래의 학설과도 깊이 관련된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은다.

음악인류학 박사인 윤소희 위덕대 학술연구교수는 최근 ‘기호학연구’(제61집, 한국기호학회 발간)에 게재된 ‘세종·세조 악보와 불전·범문의 관계’ 제하의 논문에서 세종의 32정간보와 세조의 16정간보가 지닌 기보적 특징과 상징성을 불경과 범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음악 사상을 집대성한 ‘악기(樂記)’가 편찬될 정도로 음악을 대단히 중시했다. 위정자들은 백성들 노래로 세상을 잘 다스리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그들을 안정시키고자 했기에 음률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체제를 우주적 요소에 맞췄다. 이러한 중국 음악의 근간인 한어(漢語)는 상형문자에서 비롯됐기에 언어의 소리보다 의미의 형상화에 주력했고 음률에 있어서도 진동의 실체보다 의미론적 인지성향이 두드러졌다. 중국 악서들에서 음조의 높낮이는 중시하지만 음의 장단인 음가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송나라 때 전래돼 지금까지 연주되는 문묘제례악은 음의 시가가 모두 동일하고 음의 높낮이만 있을 뿐이다. 신라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배워온 범패 홑소리와 짓소리도 리듬이 없는 무박절의 선율로 모음을 길게 늘인다는 점에서 중국 음악의 특징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는 중국과는 달리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차원의 악보로 평가받는다.

윤 교수는 이러한 정간보가 중국이 아닌 인도 언어와 불경에서 큰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분석했다. 범어와 한글은 모두 소리글자로 격과 조사가 있어 어순이 바뀌어도 뜻이 전달되듯 유사점이 대단히 많다. 음악에서도 범어는 모음의 장단에 의해 운율이 결정되므로 고대부터 음의 시가를 매우 중시했으며,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범패에서 송주되는 의례문 율조의 경우 중국의 당풍범패에서 유래한 게송들은 모음을 길게 늘이므로 박절이 없다. 허나 한국의 전통적인 향풍 범패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장단 절주 위에 낭송되고, 범풍 범패도 향풍과 비슷한 리듬 절주와 운율을 보일 정도로 비슷하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범패 중에서 빠르고 신명나거나 흥겹게 불리는 율조는 모두 당풍이 아닌 향풍이나 인도풍이다. 이는 정간보가 중국이 아닌 불교를 매개로 한 인도의 음성학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와 함께 2음보로 어휘가 형성되는 중국어와 달리 한글과 범어는 2·3음보 율조를 보이는데 이는 3·2·3 단위로 대강을 이루는 정간보의 구조와 일맥상통한다는 사실도 밝혔다.

윤 교수는 세종이 우물 정(井)자가 32개인 정간보를 만든 것에 대해서도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그동안 32는 막연히 중국 영향이라 여겨왔지만 중국 고대의 어떤 악서에서도 32와 관련되는 숫자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반면 불교에서 32는 대다수 경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부처님이 중생과는 다른 형상을 갖추고 있다는 32상이 그것으로 ‘장아함경’ ‘화엄경’ ‘법화경’ ‘금강명경’ ‘대보적경’ 등 불경 곳곳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중 고려대장경에도 편입된 ‘관찰제법행경’은 32상에 대한 설명에 이어 16자문 다라니를 받들어 지니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음을 설하고 있어 32정간의 세종보와 16정간 세조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제시했다.

세종과 세종 대 궁중음악을 기록한 악학궤범. 여기에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가들이 실려 있다.
세종과 세종 대 궁중음악을 기록한 악학궤범. 여기에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가들이 실려 있다.

윤 교수는 특히 세종과 세조 때 궁중악을 기록한 ‘악학궤범’에 영산회상불보살, 미타찬, 석가모니 본사찬(本師讚)과 ‘원통관세음이 시방을 두루하여 그 고통의 소리를 듣고 32음으로 답한다’는 노래와 춤의 설행방식을 비롯해 상당수의 ‘찬불가’가 수록돼 있음을 밝혔다. 이어 그는 그간 학계에서 이를 간과한 채 성리학과 음양오행, 주역의 궤효만을 적용해 ‘악학궤범’을 이해하려 했던 학문 풍토를 아쉬워했다.

윤 교수는 “세종과 세조 당시는 천여년 전부터 신봉해온 불교적 심성이 강했으므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수륙재, 민중을 위한 소리글자 한글과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한 찬불·불경·진언집·정간보 찬체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다”며 “정간보와 ‘악학궤범’에는 백성을 위하는 세종과 세조의 염원과 불교의 이상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27호 / 2020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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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2020-02-28 13:46:50
당연합니다. 실담과 한글을 맞춰보면 백약관하 지당한 원리인데 그간 불교계가 학문 뒷받침에 너무 허술했지요. 이제라도 바른 공부 힘을 보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