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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상(四相)은 무엇인가?-하

기자명 현진 스님

브라만교 유아론적 사고 떨치기 위해 강조

불교, 고정불변의 실체 있다는
브라만교 유아론적 시각 부정 
수자상‧인상을 버리라는 것도
불교의 무아론 강조하기 위함

아뜨만(ātman)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상정하여 그것은 영원불변하다 여기며, 우리가 절대상태인 브라흐만(brahman)에 이를 때까지 그 아뜨만이 주체가 되어 윤회를 거듭한다는 것이 브라만교의 생각[有我論]이다. 불교에선 절대상태인 브라흐만은 ‘해탈’이란 개념으로 흡수하였지만 아뜨만을 비롯한 그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無我論]고 하여 모든 것은 인연의 화합으로 생겼다 사라질 뿐이라 여긴다.

브라만교가 부처님 시기를 전후하여 일어난 신흥종교들의 사상에 밀려 쇠퇴하였지만 불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상들은 그래도 ‘유아론’에 기반한 생각들을 펼쳤다. 그들 신흥사상가들이 비록 브라만교를 혁파한다고 외쳤지만, 무엇인가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여 그것이 주체가 되어 윤회를 거듭한다는 생각에는 주요 사상가들이 동조하였던 것이다.

수자상(壽者相, jīva­saṁjñā)은 부처님과 동시대에 자이나교를 창시한 마하비라에 의해 주창된 생각을 말한다. 브라만교에서 고정불변의 실체로 아뜨만을 상정하였다면 자이나교는 그것을 지와(jīva)라고 하였을 뿐, 유아론에 근거하여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은 동일하다. 물론 ‘순수영혼’으로 번역되는 지와는 생사와 시간을 초월하는 등 아뜨만과 유사하지만 아뜨만이 갖는 불합리성을 온전히 제거하여 ‘완벽한 고정불변의 실체’라고 자이나교에선 강조하고 있긴 하다. 이것을 구마라집 스님은 수(壽)로 번역하고 현장 스님은 명(命)으로 옮겼는데, 중국에서 굳이 자이나교를 들먹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쯤엔 한문번역어에 기준하여 수자상을 오래 살려는 욕심 등으로 이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인상(人相, pudgala­saṁjñā)은 그 기본생각이 유아론에 근거한 것인 듯함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도 부파불교의 한 갈래인 독자부(犢子部)에 의해 제기되고 주장된 사상이다. 불멸 후 300년경이 지난 부파불교시대에 윤회를 설명함에 있어서 무아론의 경우 윤회하는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독자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아에도 속하지 않고 물질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존재를 ‘뿌드갈라’란 이름으로 등장시켜 불교의 무아론도 만족시키고 윤회의 주체도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이 인상이다. 불교의 유식사상도 인상과 비슷한데, 유식사상이건 독자부의 인상이건 그들의 주장을 면밀히 따라가다 보면 분명 유아론이 아닌 무아론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금강경’에서 수자상과 더불어 인상을 떨쳐버려야 할 아상의 또 다른 형태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은 ‘금강경’이 저작된 시기에 독자부의 인상에 의한 폐해가 심각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울러 현재와 미래에 불교 안에서 일어날 새로운 ‘인상’이 생겨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수자상과 인상은 브라만교의 아상이 자이나교와 불교의 한 부파에서 단지 조금 더 다듬어진 사상에 새로운 이름을 달고 나온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대승불교의 발흥기이자 ‘금강경’이 저술되었던 시기에 나름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대표적인 유아론이었던 까닭에,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브라만교의 아상과 더불어 대승불자라면 떨쳐버려야 되는 생각으로 ‘금강경’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생상은 여타의 3상과는 약간 색깔이 다른, 아리안 계열의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나열순서는 비록 약간 틀리지만 범어본과 구마라집역은 동일한 4상인데 반해 현장역은 무려 9상으로 되어 있다. 현장 스님이 번역했을 범어판본은 남아있지 않은데, ‘대반야경’ 권577에도 현장역과 동일한 9상을 언급하고 있으니 단순히 불려놓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9상은 4상에 사부상(士夫想,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 의생상(意生想, 마음으로 이뤄진 몸이 있다는 생각), 마납파상(摩納婆想, 뛰어난 자아가 있다는 생각), 작자상(作者想, 행위의 특정 주체가 있다는 생각), 수자상(受者想, 대상을 받아들이는 특정 주체가 있다는 생각) 등 5가지가 더해진 것이다. 이 가운데 ‘마납파’는 힌두교의 비슈누파에서 궁극적인 자아로 상정하는 것이니, 곧 이들 또한 아상의 다른 모습들일 뿐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27 / 2020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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