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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행복 ⑤

기자명 박희택

‘탈무드’에도 신 아닌 인간 행복 담겨

유대인들의 불교개종이 늘어
유대인 불교도라는 조어탄생
유대교는 고통을 방치하지만
불교는 고통의 끝을 찾아간다

대극(對極)을 합일하는 전일성(全一性, Einheit)은 이타와 자리를 융섭하는 이리원만(二利圓滿)의 불교가 지닌 뚜렷한 특장(特長)이지만, 초월적 본체를 전제로 하는 노장과 탈무드에서도 일정 정도 보인다. 이를테면 ‘도덕경’ 제27장의 “선한 이는 선하지 않은 이의 스승이며, 선하지 않은 이는 선한 이의 바탕이다(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는 말씀은 울림을 준다.

선하지 않은 이를 선한 이의 바탕[資]으로 보는 안목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의 “깨달음은 중생에 속하는 것이니, 만약 중생이 없으면 일체보살이 마침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다(菩提屬於衆生, 若無衆生 一切菩薩 終不能成無上正覺)”와 통하는 바가 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 깨달음의 바탕이라는 안목이다. 이처럼 화엄사상과 노자사상이 어느 면에서 상통함은, 노자사상이 자연론적 도에 의탁한 초월성을 기조로 한다고 하여도, 불교의 연기론과 동양적 상대주의의 맥락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자’ 우언편에는 공자의 입을 빌려 “이(利)와 의(義)를 앞에 펼치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며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다만 남의 입을 이길 뿐이다(利義陳乎前, 而好惡是非 直服人之口而已矣)”고 설파하면서 “사람들을 마음으로 따르게 하고, 감히 대립하지 않아야 천하의 안정을 확정하게 된다(使人乃以心服, 而不敢蘁立 定天下之定)”고 하여 심복(心服)으로 귀결하고 있다. 입으로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할 것이 아니라, 심학(心學)으로 행할 것을 권면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자와 불교의 만남이라 칭할 수 있겠다.

유대인들의 ‘탈무드’는 구전 토라를 말하는데, 이것은 토라(모세 오경)에 대한 말로 된 해설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6개 주제별로 성문화한 것이 ‘미쉬나’이다. 흔히 탈무드라 할 때는 이 미쉬나를 지칭한다. 미쉬나에 대한 토론집인 ‘게마라’도 탈무드에 포함되나, 탈무드의 중심은 미쉬나이다. 6개 주제의 미쉬나 중 첫 번째는 ‘즈라임’이고, 즈라임의 제1책은 ‘버라호트’이다. 버라호트에는 감사의 표시로 올리는 많은 축복기도가 나온다.

이 축복기도는 신의 위대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사드리기도 하지만, 세상 속에서 겪는 고난과 연민과 슬픔 등에 대해서도 감사드리고 있다. 좋은 소식에 대해서는 물론이지만 좋지 않은 소식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의 모든 순간에 감사드린다는 것이고, 이것은 ‘삶의 행복을 축원[祝福]’하기 위해 항상 기도한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의 행복기도는 좋지 않은 소식에 대해서도 감사의 기도라는 양식을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유일신을 신앙해온 유대인들이지만 불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어 유대인 불교도(JewBu)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미국 불교도의 3분의1이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다윗의 별 위에 팔정도가 형상화된 법륜을 배치시킨 엠블렘도 사용한다. MBSR(Mindful ness-Based Stress Reduction, 마음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을 창안한 존 카밧친, IMS(Insight Meditation Society, 위파사나명상회)를 설립한 잭 콘필드 등이 대표적인 유대인 불교도이다.

이들은 고(苦, duhkha)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의 관점과 같이 고통을 문제의 핵심으로 보고, 유대교는 최악일 때 고통을 방치하지만 불교는 명쾌하게 고통의 끝을 찾아간다고 자신들의 전환의 저간을 밝힌다. 더구나 유대교는 원죄설을 믿지 않으며, 숙명론적 칼뱅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간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 삼가고 마음을 다하는 인간 주체적 접근을 강조한다. 신의 섭리에만 맡기지 않는다.

토라의 하나인 ‘신명기’에 나오는(4: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는 명제가 이러한 관점을 대변하고 있고, 토라에 대한 해설서인 탈무드는 이를 더욱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다. 이처럼 초월론적 탈무드에서도 신이 아닌 인간의 행복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불교가 견지하고 있는 자타일여의 전일성에 기반한 덕분이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527 / 2020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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