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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핑크 카펫은 비워두자

일주일에 두세 번 연신내에서 동대입구역까지 지하철을 이용한다. 정확하게 20분 거리다. 짧은 시간이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핑크 카펫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좌석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핑크빛 색상이 인상적이었다. 핑크 카펫은 임신한 여성과 뱃속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배려의 산물이다. 경로석이 과거의 수고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담고 있다면 핑크 카펫은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하는 기다림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이 자리에는 반드시 임산부만 앉았으면 좋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나의 이런 조바심은 일종의 직업병일지 모르겠다는 의구심마저 든다.

연신내역에서 뒤쪽 두 번째 칸에 타야 동대입구역 하차와 출구 찾기가 편하다. 승차하자마자 바로 오른쪽이 핑크 카펫 좌석이다. 그 순간 갑자기 화가 난다. 당신이 왜 거기에 앉아있느냐고 악구(惡口)라도 내뱉고 싶어지는 장면들 때문이다. 젊은 사람이 앉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남녀불문 중장년층 꼰대들이 자리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기 일쑤다. 사람들은 임산부가 보이지 않는데도 굳이 핑크 카펫을 빈자리로 남겨둘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임신한 여성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핑크 카펫은 언제나 임산부를 위한 전용공간으로 남겨두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속은 애초의 취지가 그대로 반영될 때 비로소 본래적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임산부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핑크 카펫은 오직 그러한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약속을 함부로 어기는 사회는 공동체의 발전목표를 공유할 수 없다. 지금 핑크 카펫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은 내일 자기 앞에 서 있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사실상 없는 사람들이다. 유사한 광경은 전철 안에서 매일 반복되고 있는 일상사이기도 하다.

한번은 어떤 여성이 핑크 카펫에 앉아 있던 중년여성을 갑자기 일으켜 세우더니 그 자리에 고꾸라지듯 털썩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핏기 없는 얼굴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임신한 여성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서 있는 임산부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딴청을 피우고 있던 중년여성은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젊은 여성의 당찬 모습에 내 속이 다 후련해졌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임신한 여성이 안쓰럽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나서서 중년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중재했더라면 이런 해프닝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자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어떤 날에는 정말 개념 없는 사람들을 만나 아침부터 기분이 엉망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이 타는가 싶더니 잽싸게 핑크 카펫을 차지한 다음 자기 아이를 불러 그 자리에 대신 앉히는 것을 보는 날이 바로 그런 날에 속한다.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외면해도 그만이지만 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쉽게 풀지 못한다. 이쯤 되면 오지랖도 보통 넓은 오지랖이 아니다. 잘못하면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또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사실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만에 하나 당신이 뭔데 그러냐고 시비라도 걸면 솔직히 말해 내가 뭐라고 대꾸할 것인가. 고스란히 당할 일만 남게 된다. 그날 하루는 말 그대로 일진이 사나운 날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 핑크 카펫은 제발 그대로 비워두자. 그 자리는 우리의 미래가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우리에게 그만한 정신적 여유도 없다면 스스로 자신의 인간적 가치를 반문해 볼 일이다. 작은 것의 실천만으로도 얼마든지 품격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말자. 핑크 카펫에 함부로 앉지 않는 사람들이 머지않아 애물단지가 되고 말 마스크를 이렇게까지 사재기할까 싶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28호 / 2020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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