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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삶을 철학하다-데카르트의 이 뭐꼬

철저한 의심·비판으로 새로운 지식체계 정립 시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불변의 진리로 수용
절대 진리로서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불교 무아론과 정면 배치
‘생각함’은 시간 따라 내용이 달라지기에 ‘동일한 나’ 증명 못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철학은 모든 것을 비판하고 의심한다. 모든 연구 분야의 가장 기본 전제도 따져 묻는다. 물리학에는 그 이론의 구조적 성격에 대해 질문하고, 생명과학에는 생명현상의 의미를 캐묻는다. 철학은 스스로의 학문적 성격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심한다. 태생적으로 ‘이 뭐꼬’의 작업이다. 나는 가끔 위대한 철학자는 전생에 분명 ‘이 뭐꼬’ 화두를 들었던 선사였을 거라고 우스개 소리하는데, ‘이 뭐꼬’로 가장 크게 깨칠 수 있었던 철학자는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없는 명석 판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아 그 위에 지식의 체계를 처음부터 새로이 세우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기존의 지식 하나하나에 대해 그것이 믿을 만한 것인지 철저히 의심하고 비판했다. 말하자면, ‘이 뭐꼬’로 모든 상(相)을 걷어내려 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방대한 지식 내용을 하나씩 따지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는 원리를 검토하며 그 원리에 결점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얻은 지식은 모두 의심스럽다고 판단한다.

데카르트의 첫째 표적은 감각을 통해 얻는 지식이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얻은 정보내용이 종종 오류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황달에 걸리면 세상이 노랗게 보이고, 추운 곳에 머물다 실내에 들어오면 상온에도 덥다고 느낀다. 이렇게 오감은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은 확실한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오감을 통하지 않고 아는 우리 몸의 상태에 대한 지식 또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팔이 제대로 있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전쟁터에서 팔을 잃은 군인이 20년이 지나도 그 (없는) 팔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유령통증 현상도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이 에세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내가 실은 잠자리에서 에세이를 쓰는 꿈을 꾸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반박할 것이다. 우리는 수학이나 논리학의 진리는 꿈속에서도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한 지식이라고 보는데, 데카르트는 ‘2+3=5’와 같은 수학의 진리도 어떤 악마가 우리 모두를 속여서 실은 ‘2+3=6’이 맞는데 우리가 언제나 ‘2+3=5’가 옳다고 판단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이와 같이 모든 지식은 그 지식 산출의 원리에 대한 데카르트의 ‘이 뭐꼬’에 의해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되고 제거되어 버린다. 이렇게 모든 상(相)이 걷어졌으니 그는 깨칠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여기서 붙잡고 매달릴 불변의 진리를 찾아냈다고 오판해 깨치지 못하고 만다. 그가 악마에 의해 기만당하더라도, 그렇게 기만당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그의 존재는 확실하다. 그가 생각하는 한, 즉 그의 의식이 작동하는 한 그의 존재는 결코 부정될 수 없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의심의 여지없는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며,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모든 지식의 체계를 정초(定礎)하는 철학의 제1원리로 간주한다.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를 바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또 더 나아가 나머지 세계의 존재도 증명하며 존재세계 전체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체계를 정립한다. 그런데 절대 진리로서의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불교의 무아론(無我論)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철학자들은 확실한 진리가 하나라도 있다면 데카르트가 발견한 ‘생각하는 나의 존재’가 바로 그것일 거라고 믿는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 나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아론을 강의할 때마다 내 미국학생들은 데카르트의 철학을 언급하며 불교에 반대하곤 한다. 불교는 데카르트를 앞세운 서양철학의 도전에 어떻게 응수해야 할까?

우리는 먼저 데카르트의 ‘생각’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이 ‘생각’이란 실은 사고, 추론, 희망, 의심, 갈망, 믿음 등 모든 종류의 의식 작용을 일컫는다. 의식의 모든 작용을 묶어 ‘생각’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분명히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1) 고정불변한 영혼(마음)이 먼저 기체(substratum)로서 존재하고 그것이 나이며 또 그것이 생각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2) 그런 실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생각함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말인가?

(1) ‘나(마음)’가 생각함이라는 속성 또는 작용이 자리 잡는 기체라면, 우리는 먼저 이런 기체가 무엇이냐고 질문해 보아야 한다. 스스로는 속성이 없지만 모든 속성이 걸려있는 기반이라는 기체란 과연 무엇일까? 답변하기 어렵다. 흄이 로크의 견해에 대해 비판하면서 쓴 표현에 의하면, 이런 기체는 ‘불가해한 괴물’ 같은 것일 뿐이다. 존재한다고 인정해 주기 곤란하다.

(2)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생각함’ 자체라면, 그것은 나를 언제까지나 동일한 나이게끔 해주는 고정불변한 무엇일 것이다. 만약 위의 ‘불가해한 괴물’이 존재한다면 이런 것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함’이 과연 그런 것일 수 있을까? 위에서 보았듯이, 생각함은 사고, 희망, 의심, 갈망, 믿음 등 다양한 종류의 의식작용을 뭉뚱그려 말한다. 그런데 이 각각의 의식작용과 내용은 쉼 없이 변한다. 그래서 ‘생각함’도 끊임없이 변한다. 이렇게 무상(無常)한 의식이 어떻게 나를 언제나 동일한 나이게끔 만들어 주는 고정불변의 본질이 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다양한 의식 작용이 변화하며 시간상으로 이어지는 4차원적 연속체를 ‘생각함’이라고 보며 또 그것이 ‘나’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각함으로서의 나’가 다른 시점(時點)마다 다른 의식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같은 나라고 보아주기 어렵다. 이와 같이 ‘생각함’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다른 내용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으로 불변의 본질을 가진 동일한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한 생각함의 존재는 확실한 진리’임을 보였지만, ‘나의 존재’는 증명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철학이 불교의 무아론을 반박할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비록 그가 ‘이 뭐꼬’ 화두를 질끈 깨물었지만, 데카르트가 끝내 깨치지 못한 이유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28호 / 2020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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