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사상의 가치 중 하나는 ‘효(孝)’이다. 효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행해야 할 덕목을 말한다. 그런데 유가에서는 불교가 이 ‘효’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이 불교를 비난하는 것은 ‘출가’, 즉 무소유의 삶의 형태에 대한 그릇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 불교는 효의 가치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까? 효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여러 경전들이 전한다. 대표적인 경전이 ‘육방예경’으로 알려져 있는 ‘Siṅgalakovādasutta (싱갈라까에 대한 교계의 경)’을 들 수 있다. 이 경은 다양한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잘 담고 있다. 그 외의 경전들에서도 붓다가 효의 가치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다양한 일화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상윳따 니까야’에 실려 있는 ‘Mahāsālasutta(대부호의 경)’이다.
어느 날 붓다가 꼬살라국의 사왓띠에 계실 때 어떤 대부호였던 늙은 바라문이 초라한 옷을 입고 붓다를 찾아오게 된다. 그에게는 네 명의 결혼한 아들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아내들과 짜고 이 바라문과 그의 아내를 내쫓았다.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은 늙은 바라문은 마지막으로 붓다를 찾아오게 된다. 붓다는 그를 위해 시를 한 수 가르쳐 준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자식들이 함께 앉아 있는 모임의 자리에서 이 시를 읊으십시오”라고 당부한다. 그 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자식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자식들의 성장을 원했지만 / 그들은 자신의 아내들과 공모하여 나를 개가 돼지를 몰아내듯 몰아내었네 / 선량하지 못한 그들이 나를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네 / 아들의 형상을 한 야차들이 결국 늙은이를 내버렸네 / 늙어서 쓸모없는 말이 말구유에서 쫓겨나듯이 / 어리석은 자식들의 늙은 아비는 남의 집에서 밥을 구걸하네 / 불효한 자식보다 내게는 지팡이가 더 나으니 / 사나운 소도, 사나운 개도 막아주네 / 어둠 속에서는 앞에 있고, 깊은 곳에서는 바닥을 알려주네 / 지팡이의 힘으로 비틀거리더라도 다시 일어나네.(SN.I, p.176)”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의지할 데 없이 초라해진 늙은 바라문은 늙어서 쓸모가 없어진 말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인연담을 보게 되면 이 늙은 바라문은 4명의 자식들에게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었는데 그러자마자 자식들에게 쫓겨났다고 한다. 이에 붓다는 늙은 바라문을 가엾이 여겨 자식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돌이켜보아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시를 지어준 것이다. 바라문은 붓다의 가르침대로 사람들과 자식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시를 읊었다. 그러자 그 자식들은 다행히도 부끄러움을 알고 부모를 모셔가 정성껏 목욕을 시키고 자식들이 각각 한 벌의 옷을 장만하여 입혀드렸다. 이후 늙은 바라문은 붓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한 쌍의 옷을 갖고 붓다를 찾아뵙게 된다. 그리고 재가신자로서 귀의하게 된다.
붓다는 시 한 수에 늙은 바라문의 아픔과 한을 담았고 자식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되돌아보아 뉘우칠 수 있게 한 것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항상 ‘부끄러움을 알라’고 가르쳤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자신의 행동을 절제하게 된다.
붓다의 교화행은 이처럼 사람이 마땅히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특징을 갖는다. 대개는 자식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마음속에 자책과 원망을 품고 괴로워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붓다는 그 원한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지혜롭게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식들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비추어 볼 수 있도록 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붓다는 효의 의미를 단순히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 그 가치를 몸소 깨닫게 한 것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nikaya@naver.com
[1529호 / 2020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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