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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㊷ 원광의 불교사상과 새로운 사회윤리관 ③

남조서 소승 성실학 공부한 뒤 수의 중국통일 후 대승 섭론학 선택

장엄사서 승민의 제자 강의 듣고 세속학문 대신 불교 선택
금릉서 교학 공부한 뒤 소주 호거산에 칩거해 수행에 매진
수 통일 이후 대승 섭론학 배우며 바뀐 시대상황 따라 변화

 ‘삼국유사’ 원광서학조. 범어사본.

원광은 신라에서 일찍이 유학과 현학을 공부하고 제가서(諸家書)와 역사서(歷史書)를 섭렵하는 등 세속의 학문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25세 때 그러한 학문의 공부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문명국이라 일컬어지던 남조의 진(陳)에의 유학을 결심하였다. ‘속고승전’ 원광전에 의하면 원광은 진(陳)의 금릉(金陵)에 도착한 이후 이전에 가졌던 의문점들을 묻고 조사하면서, 요의(了義)를 탐구하였다. 그런데 원광은 남조의 발달한 불교의 교학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공부의 방향을 바꾸었다. ‘속고승전’ 원광전에서는 불교의 종지를 듣고 세간의 학문을 썩은 지푸라기처럼 여기게 되었고, 성인의 명교(名敎)를 찾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진주(陳主)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비로소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부처의 미묘한 말씀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수이전(殊異傳)’에서는 원광이 30세 때 삼기산(三岐山)에 들어가 4년 동안 수도하고 있던 중 신(神)의 요청으로 중국에 유학하였고, 11년 간 체류하다가 진평왕 22년(600) 귀국하였다고 하여 유학 시기와 출가 시점에 대해서 ‘속고승전’과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중국에 유학한 사실에 대해서는 ‘속고승전’의 내용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속고승전’에 의하면 원광은 출가한 뒤 ‘성실론(成實論)’과 ‘열반경(涅槃經)’ 삼장(三藏)과 수론(數論)을 두루 공부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학업 내용은 당시의 성실학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원광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수학한 불교 교학은 성실학(成實學)이었다. 원광으로 하여금 불교의 이론이 세속 학문의 그것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진로를 바꾸게 한 것은 장엄사(莊嚴寺)에서 승민(僧旻, 467~527)의 제자의 강의였다. 인도의 하리발마(訶梨跋摩)가 저술하고, 요진(姚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성실론’의 연구는 처음에는 북쪽지방에서 행하여졌으나, 그 뒤 남쪽지방에서 왕성해져서 양대(梁代, 502~557)에는 “남지 성론대승(南地成論大乘)”이라고 말하여질 만큼 가장 융성하였다. 남조의 성실학자들 가운데서 특히 승민은 지장(智藏, 458~522), 법운(法雲, 467~529)과 함께 양 무제(武帝)의 존경을 받던 양의 3대 법사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양대 후반기부터는 점차 대승의 본질인 공(空) 사상을 특히 강조하는 삼론학(三論學)에 의해 “소승(小乘)” 혹은 “권대승(權大乘)”으로 비판받으며 위축되어 갔다. 하지만 진대(557~589)까지는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삼론학과 쟁론을 벌이며 당시 남조불교의 교학연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원광이 강의를 듣고 출가를 결심하게 한 승민의 제자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승민이 양대 초기에 활약했고, 527년에 입적했음을 고려하여 직전 제자가 아니고, 손제자나 유사한 학문경향을 가진 학승일 것으로 추측하는 의견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원광이 진에 머물 당시 진의 금릉에서 활약하던 대표적인 성실학자로서는 지탈(智脫, 541~617)・혜환(慧暅, 515~589)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혜일도량의 지탈은 수대까지 활약하면서 양대 혜염(慧琰)의 ‘성실론현의(成實論玄義)’를 재정리하여 유포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원광은 ‘성실론’과 함께 ‘열반경’ 그리고 삼장과 수론(數論)을 두루 공부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수론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속고승전’에서는 석론(釋論)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혼란을 보인다. 그러나 ‘속고승전’의 판본에서는 수론으로 되어 있어 인도 부파불교의 교리인 비담학(毘曇學, 아비다르마)을 가리키는 수론이 옳은 것으로 본다. 양대와 진대에 걸쳐 성실학자들 대부분이 성실과 함께 비담을 공부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원광도 당시 성실학의 일반적인 학문경향에 따라서 수론, 곧 비담도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광은 이밖에도 당시의 학풍에 따라 ‘반야경’ ‘유마경’ ‘승만경’ 등을 공부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원광이 뒷날 ‘성실론’과 함께 ‘반야경’을 강의하고 있었던 사실이 그 증거가 된다.

원광은 진의 금릉에서 폭 넓게 교학을 공부한 이후 근처 소주(蘇州)의 호구산(虎口山)으로 들어가 속세와 단절하고 선정을 닦는 체험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아함경(阿含經)’을 공부하는 한편, 소승의 선법(禪法)인 팔정(八定, 색계의 四禪定과 무색계의 四空定)을 닦았다. 그가 닦았다는 선정수행은 후대의 공관에 기초한 대승선 수행과는 구별되는, 소승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성실학의 학문 경향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바로 원광이 계승했다는 승민의 선정 중시 경향과 상통하는 것인데, 특히 호구산은 승민이 출가하고, 사찰을 중건하고, 노년에 은거한 곳이었다. 원광이 호구산에서의 선정 수행은 당시 성실학의 학풍에 따라 교학연구에서 선수행이라는 종교적 실천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원광이 다시 호구산을 나오게 된 것은 강의를 해달라는 신도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원광은 신도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강의와 교화 활동을 펼쳤는데, 이때 원광이 주로 강의한 경론이 ‘성실론’과 ‘반야경’이었다. 그런데 ‘속고승전’ 권22에 수록된 혜민전(慧旻傳)에서는 혜민(573~649)이 15세 때인 587년에 회향사(廻向寺)에서 신라의 광사(光師)로부터 ‘성실론’을 배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광사가 원광이라면 그의 교학의 중심 경전인 ‘성실론’을 강의하였음도 재삼 확인되는 것이다.

개황(開皇) 9년(589) 수(隋)에 의해 진이 멸망하고 남조와 북조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자, 원광은 곧 수의 서울인 장안(長安)으로 옮겨갔다. 진의 수도가 함락될 때에 원광은 난병들에게 살해당할 뻔한 위기를 맞은 적도 있었다. ‘삼국사기’와 ‘수이전’에서 원광이 중국에 유학간 연대를 589년으로 기록한 것은 진에서 수의 장안으로 옮겨간 때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본다. 여하튼 당시 장안은 새로운 통일제국의 수도로서 정치면에서뿐만 아니라 학문과 종교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불교사에서 수・당 불교 성립의 중요한 전환점을 보이고 있었다. 북조 계통의 실천불교인 선・정토・계율 등의 전통은 계속적으로 발전하여 수・당불교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문제는 강남의 각파 학승들을 중앙으로 초치하여 불교 교학의 발전을 도모함으로써 북조의 실천적인 경향에다가 남조 계통의 학문적이며 사변적인 불교를 종합한 점에서 수와 당 신불교의 커다란 특색이 있었다. 원광이 진의 멸망 이후 곧 장안으로 옮겨간 데는 이러한 불교계의 상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원광은 장안에서 새로운 불교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 교학은 섭론학(攝論學)이었다. 

섭론학의 소의경전인 ‘섭대승론(攝大乘論)’은 무착(無着)이 짓고 세친(世親)이 그 해설서인 ‘섭론석(攝論釋)’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인도 유가행파의 소의경전이다. 중국에는 531년 북위(北魏)에서 불타선다(佛陀扇多)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지만, 해설서가 번역되지 못해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뒤 563년 진제삼장(眞諦三藏)에 의해 본문과 해설서가 함께 번역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경전이 번역된 진에서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였던 반면, 북방에서는 인도의 세친(世親)이 ‘화엄경’ 십지품을 해설한 ‘십지경론(十地經論)’ 연구의 성행과 함께 유식학의 경전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북주(北周) 무제(武帝)에 의한 폐불사건으로 북쪽 출신의 학승들이 남쪽으로 피난 와서 연구를 이었다. 정숭(靖崇, 537~614)과 담천(曇遷, 542~607)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정숭은 진제의 제자인 법태(法泰)로부터 새로 전래된 유식교학을 전수받고 ‘섭론소(攝論疏)’를 저술하였다. 담천은 북주의 폐불 때에 건강으로 피난 와서 유식을 연구하고 ‘섭대승론’을 널리 보급하던 중 587년 수문제의 칙령을 받아 장안으로 돌아와 대흥선사(大興善寺)에 주석하였다. 담천은 이곳에서 ‘섭대승론’ 강의를 주관하였는데, 이 강의에는 북쪽의 학자들과 함께 남쪽에서 올라온 학자들도 참여하여 유식학이라는 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담천의 저서로는 ‘섭론소(攝論疏)’와 ‘망시비론(亡是非論)’ 등 20여권이 있고, 뛰어난 강의로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다. 담천이 대흥선사에 주석한지 3년 뒤(590)에는 진제의 제자인 도니(道尼)가 역시 칙명으로 대흥선사에 주석하면서 ‘섭대승론’을 널리 보급하였다. 도니는 남쪽의 광주(廣州) 지방에서 최후까지 진제에게 사사하였던 사람으로서 그 제자들이 번성하였으며, ‘섭대승론’보다도 ‘구사론(俱舍論)’에 정통한 제자도 있었다.     

한편 원광이 남조에서 그동안 공부하였던 성실학은 수의 통일 이후 크게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중관 계통의 삼론학(三論學)이 융성하게 되고, 대승불교의 전반적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소승의 성격을 띠고 있던 성실학은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승의 아비다르마라고 할 수 있는 유식학이 널리 소개되면서 소승적 아비다르마인 성실학과 비담학은 여기에 점차적으로 흡수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성실학자들은 점차적으로 삼론학(三論學)・섭론학(攝論學)・지론학(地論學) 등의 학파로 전향해 가게 되었다. 삼론학의 성장에 따라 성실학자들이 대승으로 전향한 것은 일찍이 진대부터 있었던 일이었지만, 수의 통일 이후 삼론학이 대성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당(唐)의 초기에 이르면 학파로서의 성실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원광이 수의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북방의 장안으로 옮겨와서 강남의 금릉에서 그동안 전공해오던 성실학 대신에 새로운 섭론학을 선택한 것은 이러한 불교계의 상황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원광은 원래 성실학자들 가운데 특히 승민(僧旻)의 학풍을 충실히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승민은 성실학자이면서 동시에 남조의 대표적인 ‘승만경(勝鬘經)’의 연구자로서도 알려졌다. ‘승만경’은 ‘여래장경’과 함께 여래장사상을 전하는 대표적 경전이었고, 자장의 저술로서 ‘여래장경사기’ 3권과 ‘대방등여래장경소’ 1권 등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이것은 섭론학과 여래장사상과의 관계를 주목케 하는 것이며, 원광이 특히 섭론학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29호 / 2020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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