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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김홍도의 염불서승 : 사실과 초월의 경계에서

기자명 주수완

구름 속 스님은 전설 아닌 큰스님 실제 모습

염불 결과로 서방극락정토 오른다는 것은 벌써 신비화 됐음 뜻해
스님 뒷모습 그리기만 한 것 아닌 신비로운 종교 체험 그려낸 것
구름·연꽃, 초월을 현실처럼 보이게 만든 리얼리즘 엿볼 수 있어

김홍도, ‘염불서승’, 간송미술관 소장, 20.8×28.7㎝.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는 풍속화로 유명하지만, 김명국처럼 도석화 걸작도 많이 남겼다. 그는 풍속화가로서 조선 후기의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만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님들이 시장 같은 곳에서 탁발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마치 조선시대로 누군가 건너가 사진을 찍어 온 것처럼 당시 스님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일상생활 속 불교문화를 그렸다고 해서 김홍도가 불자였는지, 불교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단오풍정’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바위 뒤에 숨어서 훔쳐보는 두 사미승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 그가 불자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단오풍정’은 불교를 비판하는 그림도 아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성직자들이 모두 멍청하거나 음탕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처럼, 혹은 하회마을의 탈놀이에서도 승려가 음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처럼 ‘단오풍정’의 사미승들이 묘사된 것은 아니었다. 스님 수업을 받고 있는 사미승들이 아직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마음이 동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김홍도의 불교에 대한 마음까지 읽어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몇몇 그림들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를 그린 것이 아닌, 그의 불교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염불서승(念佛西昇)’이다. 이 제목은 김홍도가 붙인 것은 아니지만, 이 그림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 준다. 여기서 ‘염불’은 풍속화의 주제로도 어울릴만한 아주 일상적인 의식이나 수행이다. 그런데 ‘서승’, 즉 ‘서쪽으로 오른다’는 것은 단순한 의례의 장면이 아니다. 염불의 결과로서 서방극락정토에 오른다는 것은 벌써 신앙화되고 신비화되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단지 스님의 뒷모습을 그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을 그려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묘사된 스님의 도상은 사실 김홍도 이전의 불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1725년에 불화계의 거장 의겸(義謙) 스님이 그린 송광사 영산전 ‘영산회상도’의 사리불 뒷모습과 ‘염불서승’ 속 고승의 모습이 닮았다. 김홍도의 의겸 스님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장면을 자신만의 표현으로 변화시킨 것이 김홍도답다. 풍속화란 우리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이다. 그런 김홍도가 종교를 통한 초월적 현상을 그려내다니 풍속화의 주제로서는 전혀 리얼하지가 않다. 그러나 그는 이 장면조차 마치 ‘어느 암자에 내가 한 스님을 찾아갔는데, 도착한 순간 그 스님이 염불하다 막 극락왕생하는 모습을 보았노라’라고 담담히 풀어내는 것처럼 너무나 리얼하다.
 

송광사 ‘영산회상도’(1725년, 124×118㎝)의 하단 청문비구 사리불의 모습.

우리는 왜 이 그림을 그저 ‘고승염불’이라 하지 않고 ‘염불서승’이라고 할까? 무엇이 ‘서승’을 연상케 할까. 무엇보다 스님이 앉아있는 자리 때문이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마치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가듯 하늘에 떠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니 그냥 방석이나 바위에 앉아계신 것이 아닌 것이다. 거기다 자세히 보면 그 구름 아래에서 연꽃 여러 송이가 옆으로 삐져나와 있다. 연화대좌이다. 연화대좌라면 불교에서는 불·보살의 일반적인 대좌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 다르다. 일반적인 불화에서 연화대좌는 거대한 한 송이 연꽃이지만, 김홍도는 마치 그런 연꽃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연꽃 위에 사람이 올라가면 연꽃이 다 뭉개지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구름 사이로 여러 송이의 연꽃들이 가득 튀어나온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실제 연화대좌를 본다면 저런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구름도 연꽃도 이것이 정말 이 스님이 구름을 타고 가는 것인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높은 산 위의 어느 바위에 앉아 운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초월과 현실 사이를 일부러 모호하게 하여 초월을 현실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 아닐까?

스님의 광배를 보면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이게 광배인지, 아니면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는 태양인지 알 수 없다. 마치 지는 태양을 절묘한 각도에서 촬영하여 광배처럼 보이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저렇게 스님의 머리와 태양이 겹쳐지면서 지금 이 스님이 저쪽 태양을 향해, 혹은 태양이 지는 쪽을 향해 날아가고 계시다는 것을 실감하게끔 만들었다. 가끔 우리 주변에는 화재가 났는데 그 화재의 불꽃에서 악마의 모습을 보았다느니, 사회적으로 큰 비극이 있었는데, 그날 마침 하늘에 뜬 구름이 예수의 모습이었다느니 하는 우연의 일치인지 진정 초월적인 일인지 헷갈리게 하는 현상들이 회자된다. 나라가 어려울 때 땀을 흘리는 불상에 대한 이야기도 들린다. 이런 이야기들처럼 어떤 스님이 ‘좌탈’ 하셨는데 주변에 구름이 가득했고, 스님께 두광이 생겼더라는 목격담도 있을 법하다. 김홍도는 이렇게 초월적인 장면도 정말로 일어날 수 있음직한 사건처럼 변화시켜 그려냈으니 과연 리얼리즘의 정신이 아닐까.

그뿐이 아니다. 스님의 뒤통수를 보면 은은한 음영 같은 것이 들어가 있다. 한편으로는 삭발한 머리가 조금씩 자라 파르라니 보이는 것처럼도 보인다. 두상의 입체감과 그 표면의 느낌까지 아주 간단한 번짐으로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나아가 이 뒷모습만으로도 스님의 표정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두상은 전체적으로 둥글지만 턱은 날카롭고, 귀가 쫑긋하신 모습은 성격이 보통 깐깐한 분이 아니셨을 것 같다. 극락으로 가시는데도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는, 아니 염불 중이시라 극락에 가고 계신지도 모르시는 것처럼 보인다.

스님의 가사도 김홍도 특유의 필선으로 그리지 않고 담묵으로 음영을 넣어 스님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 깔고 앉은 구름의 복잡한 필선에 대비해 가사는 강렬한 음영으로 처리하여 스님을 구름 속에서 더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것은 전설이 아니고, 우리가 보내드린 많은 큰스님들의 실제 모습이었으리라.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29호 / 2020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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