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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5·26대 총무원장 의현 스님-중

불교방송 개국·중앙승가대 정규대학 인가 등 불교계 숙원 이뤄내

대정부 강경발언·유화책 이어가며 교계 숙원사업 꾸준히 추진
‘불교재산관리법’ 폐지와 ‘전통사찰보존법’ 대체입법 이끌어내
봉은사 사태로 혼란 있었지만 밀운 스님과 화해하며 내홍 종식

의현 스님은 불교계의 숙원이었던 불교방송 개국을 이뤄냈다. ‘종단50년 기록과 대화하다(조계종)’
1988년 12월30일 강영훈 총리로부터 ‘10·27법난’에 대한 사과를 받아냈다. ‘종단50년 기록과 대화하다(조계종)’

현대한국사에서 1987년은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군사독재권력에 맞선 ‘6·10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고, 한국사회 전반에 제도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갖춰졌다. 

불교계 내부에도 적지 않은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불교의 자주화와 불교관계악법철폐’를 촉구한 1986년 9월7일 해인사 승려대회를 계기로 불교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정권에 유착했던 기존 불교계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국가권력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하는 자성과 쇄신의 바람이 불교계 내부에서 확산됐다. ‘민중불교론’을 토대로 성장한 진보성향의 소장파 스님들과 청년단체들은 “불교자주화 운동과 사회민주화 운동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인식”(‘조계종사 근현대편’)하고 사회민주화 운동에 적극 뛰어들고 있었다. 

총무원장 의현 스님은 이런 시대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냈다.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불교의 자주화’를 앞세웠고, 해인사 승려대회에서는 “호국불교 개념의 재정립”을 외쳤다. 서슬퍼런 군사정권에 쓴 소리도 내놓으면서 정권과의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은 대정부 강경노선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스님은 대중 집회에서 정권을 겨냥한 강성발언을 내놓으면서도 정권 수뇌부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때론 “개인적으로 4·13호헌조치를 지지한다.” “전두환 대통령을 중심으로 어려운 난제들이 슬기롭게 풀려나갈 것으로 기대한다.”(불교신문, 1987년 4월22일자) 등 정권에 우호적인 발언들도 내놓았다.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불자’임을 내세워 지지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국회는 1987년 11월 ‘불교계의 자율권을 심각히 훼손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불교재산관리법’을 폐지하고, 불교계 의견이 반영된 ‘전통사찰보존법’을 대체입법으로 성안했다. 노태우 후보도 ‘불교방송 개국허가’를 대선공약으로 반영했다. 결과적으로 의현 스님의 이런 행보는 불교계의 숙원 해결로 이어졌지만, 훗날 ‘어용’논란에 휩싸이는 배경이 됐다. 그렇더라도 ‘불교재산관리법 폐지’ ‘불교방송국 개국’ 등은 정권의 도움 없이 결코 쉽지 않았을 당시 상황에서 총무원장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의현 스님이 훗날 “어용이니 뭐니 비판을 해도 개인을 위해 어용한 적은 없다. 내가 정치인과 권력자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불교재산을 되찾고, 불교방송국을 세우는 등 불교계의 숙원사업들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가 어용을 했다면 그것은 불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월간조선’, 1996년 8월호)고 항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현 스님은 특유의 친화력과 정치적 수완으로 종단 안팎의 혼란을 점차 안정시켜 나갔다. 불교방송국 및 불교중앙회관 건립과 중앙승가대 정규대학 인가 등 종단중흥을 위한 불사도 하나하나 추진했다. 

이런 가운데 중앙종회는 1988년 3월28일 92차 임시종회를 열어 ‘총무원장 중심제’로의 종헌개정을 단행했다. ‘8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이 종헌개정안은 그해 5월 ‘전통사찰보존법’ 시행을 앞두고 종단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종단 대표권을 ‘종정’에서 ‘총무원장’으로 변경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종헌개정은 종정의 권한을 축소하고 총무원장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개정된 종헌에 따르면 종단의 대표권이 종정에서 총무원장으로 변경됐으며, 종정에게 부여되던 총무원장 임면 권한이 삭제됐다. 종정의 임기를 10년에서 5년으로 줄였으며 종정에게 부여된 징계자에 대한 사면, 경감, 복권에 대한 권한도 총무원장에게 이양됐다. 

원로회의에서 추대하던 종정선출도 총무원장, 중앙종회의장, 호계위원장을 비롯해 중앙종회에서 선출한 31명과 원로의원으로 구성된 ‘종정추대위원회’에서 추대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총무원장은 중앙종회의원도 겸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입법기관인 중앙종회에 행정부 수반인 총무원장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는 것이었다. 3권 분립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문제였지만 이날 중앙종회에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중앙종회는 이날 중앙종회의원선거법도 개정해 전체 재적의원을 기존 70명에서 75명으로 늘렸다. 각 교구본사별로 2명씩 48명을 선출하고 간선의원으로 27명을 두도록 했다. 간선의원은 선·교·율 분야에서 비구 22명, 비구니 5명을 선출하도록 했다. 간선의원을 뽑는 간선선출위원회 위원장은 총무원장이 맡기로 했다. 92차 임시중앙종회에서 통과된 종헌과 종법개정안은 의현 스님이 오랜 기간 총무원장에 머무를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러나 의현 스님의 권력이 커질수록 그에 따른 반발도 커졌다. ‘한겨레신문(1988년 6월12일자)’에 따르면 이 무렵 조계종은 봉은사 주지 문제를 두고 내홍에 휩싸였다. 봉은사 주지 밀운 스님과 의현 스님은 총무원장 선거과정에서의 앙금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밀운 스님은 1987년 11월 90회 정기중앙종회에서 종단 행정의 난맥상을 이유로 총무원장 해임권고 결의안 발의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랬기에 두 스님의 감정 골은 깊게 패인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현 스님은 1988년 4월13일 92차 중앙종회에서 소란을 피운 책임을 물어 봉은사 주지 밀운 스님을 해임하고, 부주지 대운 스님을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했다. 밀운 스님 측은 “총무원의 결정은 징계위원회를 거치지 않은 불법”이라고 반발하며 ‘주지발령 무효확인’ 가처분을 제기했다. 5월24일 대운 스님 측이 봉은사 인수인계를 위해 사찰 진입에 나섰다가 밀운 스님 측 신도들에 의해 밀려나며 사태가 악화됐다. 

의현 스님은 6월2일 다시 봉은사 주지에 승가대 사무총장 성문 스님을 임명했다. 성문 스님은 1983년 비상종단에 참여했고, ‘새로운 승가운동’을 표방하며 그해 3월 창립된 ‘대승불교승가회’의 주축멤버이기도 했다. 성문 스님은 언론인터뷰를 통해 “불교중흥과 승가대 발전, 나아가 종단분규의 근절을 위해 이번 분쟁은 반드시 대화를 통해 풀어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성문 스님은 6월23일 새벽 3시경 승가대 학인과 신도 등 150여명을 이끌고 봉은사 뒷담을 넘어 경내로 들어갔다. 밀운 스님 측이 맞서면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양측은 돌을 던지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등 40여분간 난투극을 벌여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봉은사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로 조계종은 세간의 따가운 비판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봉은사 사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밀운 스님은 1988년 12월26일 봉은사에 별도의 총무원을 세우면서 종단분규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런 가운데 국회가 1988년 6월 ‘5공 비리특위’를 구성해 전두환 정권의 비리에 대한 진상규명에 착수했다. 청문회가 진행되면서 ‘일해재단 비리’ ‘광주민주화항쟁 강제진압’ ‘언론학살’ 등 신군부가 자행한 비리들이 속속 밝혀졌다. 불교계도 ‘10·27법난’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월주 스님 등 중진 46명은 1988년 11월22일 ‘10·27법난 진상규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0·27법난의 입안 및 시행, 수사과정을 5공 비리특위 차원에서 철저히 밝혀 달라”고 촉구했다. 의현 스님은 월주, 정휴 스님과 함께 12월21일 문공부 장관을 만나 “10·27법난에 대한 정부 측의 사과”를 요구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그러자 강영훈 당시 국무총리는 그해 12월30일 특별담화를 내고 “80년 10월27일 비상계엄 하에 진행됐던 불교계 수사로 불교도와 불교의 자존에 깊은 상처를 입히게 됐던 점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강 총리는 이어 “정부는 이 사건으로 피해를 본 불교계에 보상과 실추된 권익회복과 불교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0·27법난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이 이뤄지지 않아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였지만 불교계로서는 정부차원의 첫 공식사과라는 점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는 그해 11월23일 인제 백담사에서 칩거를 시작했다. ‘5공 비리특위’가 가동되면서 거세진 비판여론을 피해가기 위한 것이었다. 의현 스님은 이들의 백담사행을 주선했으며, 수시로 들러 이들의 편의를 제공했다. 이에 대해 의현 스님은 “약자를 돌보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다”(‘월간조선’, 1996년 8월호)고 회고했지만, 결과적으로 종단 내부에서 반발여론이 커지게 한 배경이 됐다. 

1989년 들면서 조계종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문공부는 그해 3월2일 불교방송국 설립을 위한 재단법인 설립을 인가했으며 무선국허가도 승인했다. 이에 따라 1990년부터 불교방송국은 첫 전파를 송출할 수 있게 됐다. 1987년 불교방송국 설립을 추진한지 2년 만에 거둔 쾌거였다. 이일을 계기로 의현 스님은 그동안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봉은사 사태도 해결에 나섰다. ‘경향신문(1989년 5월6일자)’에 따르면 의현 스님은 5월4일 총무원에서 밀운 스님을 만나 불교중흥과 종단화합을 위해 화해하기로 합의했다. 의현 스님은 “종단행정의 시행착오를 인정한다”면서 밀운 스님에 대한 징계해제와 거처할 사찰 제공 등 제반문제를 화합차원에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의현 스님과 밀운 스님 간의 갈등의 골은 메워졌고, 1년간 지속된 종단분규도 해결됐다. 

조계종을 향한 훈풍은 이어졌다. ‘동아일보(1989년 5월20일자)’에 따르면 중앙승가대는 그해 5월 교육부로부터 대학학력인정 각종학교로 인가받았다. 1979년 설립된 이후 비인가학교로 머물러 있던 중앙승가대가 처음으로 4년제 대학에 준하는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불교방송 개국에 이어 또 하나의 불교계 숙원사업이 성취된 셈이었다. 

의현 스님은 재임을 향해 순항했다. 비록 1989년 8월 동국대 입시부정으로 총장과 이사장이 동시에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해 혼란이 일기도 했지만 의현 스님의 재임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의현 스님은 1990년 6월9일 교구본사주지회의에서 총무원장 재출마를 공식 표명했다. 그리고 6월22일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72명이 참석한 가운데 42표를 얻어 29표를 얻는 데 그친 월탄 스님을 누르고 제26대 총무원장에 당선됐다. 1962년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4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총무원장에 연임된 것은 의현 스님이 처음이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30호 / 2020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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