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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상(相)을 갖지 말라?

기자명 현진 스님

부처님, ‘금강경’서 무아론 재차 강조하다

대승불교가 흥하는 무렵부터
다시 변형된 유아론이 득세해
부처님 근본가르침 회귀 위해
금강경 무아론 주된 주제 삼아

제4 묘행무주분의 ‘응무소주행어포시(應無所住行於布施, 머무는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와 제10 장엄정토분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이란 글귀는 ‘금강경’의 유명한 문구 가운데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 이렇게 두 문장을 놓고보면 완전한 내용을 갖춘 것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머물다’라는 동사는 타동사이므로 당연히 목적어가 필요하다. 즉 ‘집에 머물다' 등으로 어디에 머무는 지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다. 그러면 한문 원문에 해당 내용이 빠져있는가? 그렇지 않다. 바로 앞부분에 분명히 해당 내용이 어엿하게 존재한다.

위의 두 글을 한문원문에 나타난 그대로 문장을 완성시켜 보면, 묘행무주분의 것은 ‘법에 있어서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라고 분명히 ‘법’이라고 언급되어 있음은 물론 그 뒤에 연이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재차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장엄정토분의 것은 해당 문장 앞에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어선 안 되나니’라고 별도의 문장으로 어디에 머물지 말아야 할지를 잘 설명해놓고 있다. 두 문장은 ‘보시를 할 때나 마음을 낼 때는 색・성・향・미・촉・법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라고 어디에 머물지 말지를 분명히 밝혀두고 있음에도 그 내용을 떼버리고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고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는 문장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경전의 명문장 가운데 정작 내용에 요긴한 부분은 생략된 것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본래 의도한 내용이 생략되어 전해지는 것도 아닌, 어쩌면 더 넓고도 깊은 내용을 품고 있는 문장이 되는 기이한 현상까지 없잖아 있으니….

‘금강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거의 일관되게 ‘아상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처음 가르침을 펴실 때 이미 만연했던 브라만교의 아뜨만(ātman)사상인 유아론(有我論)을 무아론(無我論)으로 대체하셨는데, 대승불교가 흥기했을 때쯤엔 다시 슬금슬금 이런저런 유형의 변형된 유아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에 대승불교는 부처님께서 펼치신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즉 무아론의 부흥이 주된 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유아론의 ‘아(我)'는 구체적으로 ‘아뜨만(ātman)'이니, 브라만교에선 아뜨만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기 때문에 ‘아뜨만이[我]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有]한다는 논리[論]’가 바로 유아론이다. 그러니 브라만교도에겐 아상(我相, 아뜨만이 고정불변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당연히 근본교리로 존재한다. 그것을 부정하여 그렇지 않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아론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상(我相)을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금강경’에서 아상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유사형태의 모든 상(相)을 갖지 말라고 한 것이 ‘금강경’의 4상 혹은 9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금강경’이 중국으로 건너와 한문으로 옮겨지며 아뜨만(ātman)을 아(我)로 옮겨놓긴 했지만 인도사람들에게 와 닿는 아뜨만에 대한 본질적인 느낌이 중국 사람들의 경우엔 상당히 옅어질 것이란 것은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아상(我相)만 그렇겠는가? 인상(人相)이든 중생상(衆生相)이든 별 차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4상에 대한 풀이만 해도 ‘나라는 생각, 내가 사람이라는 생각, 사람들이 모인 중생이라는 생각, 중생은 목숨을 가졌다는 생각’ 등으로 중국화가 되었던 것이다.

법과 색 등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하란 말이 어디 머물지를 빼버리고 단지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라!’로 정착했듯이, 아상이나 중생상 등을 갖지 말라는 말도 상(相)의 구체적 유형을 빼버리고 단지 ‘상(相)을 갖지 말라!’로 정착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혼란을 야기했다기보다는 한문이 지닌 다의성(多義性)의 힘에 기반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더 깊은 사고를 유도하였다고 보아야 하니, 어쩌면 조금은 이상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된 셈이다. 이제 우리가 한문에 범어까지 ‘금강경’을 읽는 것은 청(靑)색과 남(藍)색을 모두 즐기기 위해서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30호 / 2020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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