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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㊸ 원광(圓光)의 불교사상과 새로운 사회윤리관  ④

점찰법회·세속오계로 불교치국정책 벗어난 새로운 불교 모색

원광은 승려로서의 임무를 넘어 정치외교가로서 역할도 수행
가실사 머물며 신라 최초 여래장 사상에 입각 점찰법회 개최
불교와 유교 아우른 지식인으로 선각자적 고민의 흔적들 남겨 

청도 운문사 전경. 일연 스님은 청도 운문사에 머물며 원광 스님의 점찰법회에 대한 고문서를 확인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청도 운문사 전경. 일연 스님은 청도 운문사에 머물며 원광 스님의 점찰법회에 대한 고문서를 확인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원광이 오랜 중국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것은 진평왕 22년(600)이었다. 진흥왕 36년(575) 즈음 25세의 나이로 남조의 진나라로 유학을 떠나 금릉에서 성실학을 비롯한 다양한 조류의 불교학을 섭렵하였다. 진평왕 11년(589) 진이 멸망하자, 수나라의 장안으로 옮겨 새로 유식학 계통의 섭론학을 공부하면서 수문제에 의한 불교치국정책과 남조의 교학불교와 북조의 실천불교가 종합되는 불교계 변화상황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50세 전후인 진평왕 22년에 본국의 요청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25년이 넘는 장기간의 유학생활이었다. 

‘속고승전’ 원광전은 원광의 귀국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큰 업적을 이루자 도를 동쪽으로 전하려고 생각하였다. 본국에서 멀리 이 소문을 듣고 글을 올려 원광을 돌려보내줄 것을 여러 번 요청했다. (황제가) 칙명으로 후하게 위로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원광이 수십 년만에 돌아오니 늙은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서로 기뻐했다. 신라왕 김씨(진평왕)도 만나보고는 공경하여 성인처럼 우러러 보았다.” 

원광은 진평왕 22년(600) 귀국한 이후 30~40년 동안 활약하다가 진평왕 52년(630)에서 선덕여왕 9년(640) 사이에 입적하였다. 그 동안 원광은 승려로서 중국의 새로운 불교학을 강의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종교적 임무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인으로서 유교와 한문학을 소개하고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세속의 윤리덕목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정치적 자문을 하는 등 정치가와 외교가로서 세속적 역할도 수행하였다. 원광의 귀국 이후 활약상에 대해서는 ‘속고승전’ 원광전에서 간명하게 소개해 주었다. 

“원광은 성품이 겸허하며 여유롭고, 정이 많아 모든 사람에게 두루 사랑을 베풀었으며,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띠고 성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표(牋表)나 계서(啓書) 등 오가는 외교문서가 모두 그의 흉금에서 나왔다. 온 나라가 받들어 원광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맡기고 도의로서 교화하는 방법을 물었다. 원광은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고위관리는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사람과 같아 시의 적절하게 교훈을 펴서 지금까지도 모범이 되고 있다.” 원광의 이러한 선각자로서의 업적을 일연은 누구보다도 높게 평가하여 ‘원광서학(圓光西學)’이라는 제목으로 ‘삼국유사’ 의해편의 첫머리에 싣게 되었다. 

그런데 원광이 귀국하였을 때부터 거국적으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귀국할 때 신라의 조빙사(朝聘使) 나마 제문(諸文)과 대사 횡천(橫川)을 따라 왔다는 사실을 들어 크게 환영을 받았던 것으로 해석하는 주장도 있으나, 정기적인 교통편이 없었던 시절에는 사절편의 나랏배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고려하면 특별한 우대로만 볼 수는 없다. 실제 원광은 귀국한 직후 서울에 머물지 않고, 청도지역의 가실사(加悉寺, 嘉栖岬, 嘉瑟岬)에 머물고 있었던 사실이 당시의 분위기를 나타내 준다. 원광보다 2년 뒤에 입조사(入朝使) 상군(上軍)을 따라 귀국한 지명(智明)이 계행(戒行)을 존경받아 대덕(大德)으로 봉해졌던 것과 대조되었다. 가실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원광서학조에서 “운문사 동쪽 9,000보 가량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그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라고 주석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지역의 지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일연이 언급한 위치보다 그 바깥쪽인 청도군 운문면 삼계리 42번지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이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하튼 원광은 귀국한 직후 이곳 가실사에 머물 때 그의 전 생애 가운데서도 특필할 만한 두 가지 업적을 이루었다. 첫째는 신라 최초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개최한 것이고, 둘째는 찾아온 두 젊은이에게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새로운 윤리덕목으로서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주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점찰법회는 이후 한국의 불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며, 세속오계는 신라의 사회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첫째 점찰법회에 대해서는 일연이 가실사 인근의 운문사에 머물면서 동평군(東平郡)에 전하는 고문서를 확인했던 사실까지 전해주고 있다. “원종(原宗,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킨 이래로 진량(津梁, 다리)은 비로소 놓았으나, 당오(堂奧, 깊은 이치)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마땅히 귀계멸참(歸戒滅懺), 즉 계율에 귀의하여 참회함으로써 우매함을 깨우쳐 주어야 했다. 그래서 원광이 머물고 있던 가서갑에 점찰보(占察寶)를 두어 영원한 규범(常規)으로 삼았다. 이때 한 단월리(檀越尼)가 그 점찰보에 전답을 바쳤는데, 지금 동평군(東平郡)의 전답 100결이 이것으로 옛날 문서가 아직도 남아있다.” 점찰보는 점찰법회를 영구적으로 열기 위한 기금으로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법회에서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점찰법회의 교리적 근거가 되는 경전은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인데, 수나라 초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역사상 유명한 점찰법회는 원광이 장안에 머물 때인 개황(開皇) 13년(593) 광주(廣州) 지역에서 뭇 남녀가 어울려 ‘점찰경’에 의거하여 몸이 부서질 정도로 참회하는 탑참법(塔懺法)을 행한 법회였다. 그런데 이 법회의 성격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경전의 진위(眞僞)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논쟁의 결과 이 ‘점찰경’은 불경 목록에 책 이름이나 번역자・번역장소가 없고, 탑참법도 일찍이 경전에 보이지 않던 괴이한 것이라는 법경(法經) 등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중국에서 지어진 위경(僞經)으로 판정되었다. 이 경전은 남북조말기 수나라 초기의 말법(末法)사상에 기초하여 사회 저변층의 교화에 관심을 두고 편찬된 것으로서 민간 점복신앙을 활용하여 우매한 중생을 순수한 불교신앙으로 이끌어 참회 수행케 하려는데 의의가 있었다.

‘속고승전’ 원광전에서 원광의 장안에서의 활동 내용 가운데 섭론학을 공부한 것 이외의 사실이 전연 언급되어 있지 않은 점을 주목하고, 말법사상에 기초하여 만인의 평등과 빈민구제의 교리를 내걸어 한때 크게 유행했던 삼계교(三階敎)와의 관련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원광이 귀국하던 해에 삼계교에 대한 첫 박해가 있었고, 귀국 직후 가실사에 칩거하면서 삼계교와 같은 사회성격의 점찰법회를 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등의 불사(佛事)를 중시하는 수문제의 불교치국정책이나 왕권 강화와 국가의식 고취를 위주로 하는 신라의 호국불교의 발전정책과는 다소 다른 성격의 불교 방향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원광의 불교에서 ‘점찰경’이 특히 주목받은 것은 그 하권의 내용이 역시 위경 논란의 대상이 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그것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찰경’이 여래장의 실천신앙을 서술한 것이라면, ‘대승기신론’은 여래장(如來藏)의 교의를 이론화하면서 ‘점찰경’에다 수사를 덧붙여 정연하게 체계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원광에게는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 3권과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1권 등 여래장 관계 저술의 이름만이 전하는데, 그 이름만으로도 그가 여래장 사상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던가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원광이 여래장 사상을 가지고 대중교화에 나선 것이 점찰법회였고, 법회의 항구적인 개최를 위해 기금으로 점찰보까지 마련하였다.

한편 원광이 가실사에서 이룩한 두 번째 업적으로서 세속오계를 두 젊은 청년에게 제시한 것은 불교에 관한 업적보다도 더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세속오계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첫째 임금 섬기기를 충(忠)으로써 하며, 둘째 어버이 섬기기를 효(孝)로써 하며, 셋째 친구 사귀기를 신(信)으로써 하며, 넷째 전쟁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 것이며, 다섯째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할 것 등 다섯 가지 덕목이다.  그런데 이 세속오계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원광에게 종신토록 지켜야 할 교훈을 받은 두 청년, 곧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2년 뒤 백제와의 전투에서 그대로 실천한 사실이었다. 백제군의 복병을 만나서 신라군이 위기에 처하자, 소감(少監)이라는 하위 무관으로 참전하였던 귀산이 “전에 법사(원광)로부터 선비는 전쟁에 나아가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하고 수십 명의 적을 쳐 죽이고,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구해 낸 다음, 추앙과 함께 힘껏 싸웠다. 이 광경을 보고 용기를 얻은 신라군들은 분전하여 마침내 승전하였다. 그러나 귀산과 추항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도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맞이하여 시신 앞에 나아가 통곡하고 예(禮)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고, 귀산에게는 나마, 추항에게는 대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귀산과 추항은 맹우관계(盟友關係)였는데, 이들은 자발적으로 원광을 찾아 가서 종신토록 지켜야 할 윤리덕목으로서 세속오계를 받고, 전쟁에서 그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뒤에 세속오계는 당시 사회에서 널리 시행되었고, 마침내 화랑도의 윤리덕목으로 이해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그 덕목의 내용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별도로 상술하려고 한다.

원광은 뒤에 경주로 옮겨 가서 말년에는 황룡사에 주석하게 되었는데, ‘속고승전’에서는 황륭사석원광(皇隆寺釋圓光)으로 기록되어 황룡사와 별개의 다른 사찰로 보는 주장도 있으나, 역시 일연의 주장대로 동일한 사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원광이 중앙의 불교계에 등장하게 된 때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세속오계에 관련된 소문, 그리고 오랜 유학생활을 거친 불교 승려로서 뿐만 아니라 유교적 지식과 한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로서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진평왕 30년(608) 원광은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되었는데, 그 표문은 고구려를 치려는 군사를 수나라에 요청하는 외교문서였다. 진평왕의 요청을 받은 원광은 “자기 살기를 구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로서의 할 행동이 아니나, 저(貧道)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풀(水草)을 먹고 있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글을 지어서 바치었다. 우리는 원광이 표문을 지으면서 한 말에서, 남북조의 중국 정세를 체험한 국제적 안목과 평화와 관용의 세계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졌던 선각자로서의 원광의 고민과 갈등을 읽을 수 있다. 적어도 신라가 추구하는 좁은 의미의 국가불교와 호국불교에 대해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입장은 벗어났던 것으로 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31호 / 2020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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