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그거 다 알아. 그거 별거 없어. 들으나 마나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붓다 당시에도 자신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별거 없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붓다가 마가다국의 라자가하(왕사성)에 있는 깃자꾸따산(영취산)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사라바(Sarabha)라는 이름을 가진 떠돌이 수행자(유행자)가 승가의 일원으로 있다가 승가를 떠났다. 그리고는 라자가하의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나는 사끼야(석가)족의 아들인 수행자 고따마의 가르침을 안다. 나는 사끼야족의 아들인 수행자 고따마의 가르침을 알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과 계율에서 떠났다.”
요즘도 보면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하다가 환속해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불교 신자였다가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불교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혹은 ‘불교 미신이야’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왕왕 있다. 사라바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응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항상 상책일 수는 없다. 붓다는 비난이나 모함에 때로는 침묵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늘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붓다는 제자들의 요청으로 사라바를 찾아가 대화를 했다.
[붓다] 사라바여! 그대는 수행자 고따마의 가르침을 알고 있기에 그의 가르침과 계율에서 떠났다고 말한 것이 사실입니까?
[사라바] 침묵
[붓다] 사라바여! 그대는 나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지 말하십시오. 그대가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으면 내가 충분히 알려 주겠습니다. 만약 충분히 알고 있다면 나는 만족할 것입니다.
붓다와 사라바 사이에서 위와 같은 대화가 3번 반복된다. 말이 대화이지 사라바는 붓다의 질문에 한 마디 답변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위 대화에서 붓다는 매우 담담하면서도 거리낌 없는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의 가르침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다면 알려줄 것이요, 충분히 알고 있으면 만족하겠다는 말씀은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힐책하기 위함이 아니다. 잘 모르고 있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면 되고 잘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붓다는 주장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라바를 두고 붓다는 주변의 다른 유행하는 수행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붓다] 유행자들이여! 누군가 나에게 ‘그대는 원만히 깨닫지 못했다’, 혹은 ‘그대는 번뇌를 부수지 못했다’ 혹은 ‘그대의 가르침은 괴로움의 종식으로 이끌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그와 함께 충분히 조사하고 충분히 검토하고 충분히 논구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 가지 경우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달리 대답하거나 밖으로 화제를 돌리거나 화내고 성내고 낙담하거나 유행자 사라바처럼 침묵하며 얼굴을 붉히고 어깨를 떨구고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못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AN.I, pp.186~187)
기원 전 6세기 무렵 북인도는 자유사상가나 영적 스승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나름 진리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중에는 말도 안 되는 사기꾼들 또한 많았을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사람들과 열린 토론의 장을 활짝 열어 놓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조건적인 믿음을 말하지 않고 대화상대가 스스로 납득하여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 충분히 토론하였다. 붓다의 토론은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렇기에 붓다의 가르침은 논쟁으로 흐르지 않는다. 대화 중에 대화상대자는 문득 ‘아!’하고 알게 된다.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nikaya@naver.com
[1531호 / 2020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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