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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단원이 그렸다는 용주사 대웅전의 삼불회도-상

기자명 주수완

학계에선 ‘김홍도 작' 회의적 견해 지배적

용주사 공사 당시 보고서에는 ‘김홍도' 이름이 등장하지만
김홍도는 감독만 했을 뿐 실제 제작은 스님이 맡았다고 봐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 350×440㎝. 비단에 채색.

단원 김홍도가 그린 불화를 이야기하자니 용주사 삼불회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공식적인 명칭은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로 되어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화가 유명한 이유는 법당에 걸린 불교회화이지만 화승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니라 국민화가인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용주사라는 절 자체가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니만큼 그가 총애했다던 김홍도를 동원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불화를 그려 모시게 했을 개연성은 충분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가 지배적인 것 같으며, 특히 백과사전 등을 검색해보면 김홍도 제작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우세한 것 같다. 그러나 근래에 다시금 김홍도 제작설을 주장하는 설득력 있는 글들이 발표되어 이번 연재에서 이 작품을 다루지 않을 수는 없을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불화 연구자들은 김홍도설에 부정적이며, 일반회화 연구자들은 김홍도설을 지지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단 논의를 위해 다른 것은 접어두고 객관적인 사실만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불교를 사랑한 예술가들’ 연재가 수년전 연재인 ‘쟁점, 한국불교미술사’처럼 되더라도 독자제위의 양해를 구한다.)

우선 김홍도 작품으로 전해지는 가장 유력한 근거는 ‘수원지령등록(水原旨令謄錄)’ 기록인데, 이것은 조정과 수원 유수부 사이에 오간 행정문서를 모아놓은 것이다. 이 중 1790년 10월6일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불상후불탱을 감동(監董)한 전 찰방 김홍도, 절충 김득신, 전 주부 이명기와··· 불상조성을 감동한 황덕순, 윤흥신은··· 2월19일부터 9월29일까지 실제 일한 날이 합하여 216일이고··· 조상변수승 계초, 화탱변수승 상겸, 목수도편수승 만겸, 부변수승 쾌성은 2월19일부터 9월29일까지 실제 일한 날이 합하여 216일···” 

일종의 용주사 공사 보고서 같은 성격의 글이다. 김홍도를 ‘전 찰방’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1784~1786년 2년간 안동의 역참을 담당하는 찰방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선비들에게는 말단직이었지만, 김홍도 같은 예능에 종사한 사람으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른 것이라고 강세황이 평한 바 있다. 이 기록은 용주사 공사 당시의 기록이므로 김홍도가 용주사 불화 제작에 관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러한 당시의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홍도 제작설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김홍도가 직접 그렸다고 되어 있지 않고, ‘감동’, 즉 감독으로 참여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러한 행정보고문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사실을 담고 있을 것 같은 용주사 대웅전 닫집에서 발견된 ‘삼세상원문’에 김홍도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용주사의 불상과 불화에 대한 발원문인데, 여기에 의하면 ‘수원지령등록’에서 불상을 감독한 인물로 등장한 황덕순, 윤흥신이 불상과 불화 모두를 감독한 것처럼 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행정문서인 ‘수원지령등록’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삼세상원문’을 신뢰할 것인가? 이에 대해 김홍도설을 부정하는 견해는 작업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작성했을 것으로 보이는 ‘삼세상원문’이 더 정확한 것이며, 설령 공식적으로는 김홍도가 관여한 것으로 되어 있더라도 다만 감독 정도만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따라서 실제 제작은 이들 사료에 등장하는 스님들이 도맡아 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이 그림이 김홍도 작품인가 아닌가의 논의가 오간 정도라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나 더 큰 논쟁은 지금부터이다. 김홍도설을 부정하는 견해는 용주사 창건 당시 설령 김홍도가 실력 발휘를 해서 후불탱화에 그의 필적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후불탱화는 당시의 불화가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후반 이후(정확히는 20세기초)에 새로 조성된 불화라는 주장을 펼쳤다. 김홍도의 작품인가 아닌가의 문제에서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아예 김홍도 시대의 작품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후불탱화에서 김홍도 운운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견해라고 못 박았다. 그렇게 연대를 내려보는 이유는 우선 불화 자체에 연대가 적힌 화기가 없어 눈에 보이는 도상과 양식으로만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이와 유사한 특징을 지닌 불화들은 대부분 19세기 후반 불화들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비교작품으로는 안성 청룡사의 삼불회도(1878년), 서울 봉은사 삼불회도(1892년)가 거론되었다.

1)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 350×440㎝. 비단에 채색. 2) 용주사 신중도. 고산당 축연 작. 1913년. 210×198㎝, 비단에 채색.<br>
용주사 신중도. 고산당 축연 작. 1913년. 210×198㎝, 비단에 채색.

특히 용주사는 20세기 초에 대대적인 중창을 거쳤는데, 이때 불화를 담당한 고산당 축연 스님이 1913년에 그린 용주사 신중도의 화풍이 대웅전 후불탱화의 화풍과 유사하여 결국 대웅전 후불탱화도 축연 스님이 새로 그린 작품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실제 용주사 신중도를 보면 다소의 음영법이 표현된 것이 대웅전의 후불탱화와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는 한다. 다만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리는 것이 사찰에 더 유리했을 것이므로 아무런 화기도 남기지 않은 채 오직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한다는 사실만 강조한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또 음영법 같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인물묘사기법 등에서는 차이가 보이는데, 이 역시 고산당 축연 스님이 김홍도 작품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다소 평소보다 더 고풍스럽게 그렸다고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김홍도설을 부정하는 또 하나의 주장이 더해졌다. 즉, 후불탱화의 본존불이 앉아있는 수미단에 쓰여진 ‘주상전하수만세’로 시작하는 축원문이 ‘세자저하수만세’로 끝나고 있는데, 이 그림이 그려진 1790년대에는 후에 순조가 될 원자가 막 태어났기는 했지만, 이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것은 1800년 1월이었으므로, 이 그림은 최소한 1800년 이후에 그려진 것을 의미하므로 김홍도와의 연관성을 고려하기가 더욱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로써 용주사 후불탱화는 김홍도 문제를 건드리려다 제작연대까지 아래로 내려오게 되면서 김홍도 제작설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31호 / 2020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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