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봉국사 주지 혜일 스님
성남 봉국사 주지 혜일 스님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20.04.06 14:35
  • 호수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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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선원 외호 해낸 담대함 ‘아프리카 54개 법당’ 원동력 삼을 터!”

영축산서 100일 기도
참선지도 받고 출가단행

일과 마치면 매일 108배
초하루 참회법회도 봉행

허리 디스크 고생에도
상월선원 총도감 자청

악조건 속 정진 이어간
아홉 선객들 깊이 존경

탄자니아 농업학교서
출가원력 인재 나올 터 

한국서 정식 승려교육 
아프리카로 보내 전법
혜일 스님은 “상월선원 정진을 통해 아홉 선객이 어느 경지에 올랐는지는 헤아릴 수 없다”며 “비 새고 수도가 얼어버린 환경에서도 정진을 이어가셨던 아홉 스님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휘이익∼

허허벌판을 휘몰아친 살찬 삭풍이 천막으로 둘러처진 상월선원(霜月禪院)을 흔들었다.  

“이 자리에서 내 몸은 말라버려도 좋다. 가죽과 뼈와 살이 녹아버려도 좋다”며 천막결사에 임한 스님들이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라” 천명한 아홉 선객이다. 하루 14시간 정진 속 공양은 하루 한 끼. 90일 묵언정진 기간 동안 옷은 한 벌만 허용됐고, 삭발목욕·외부인 접촉도 금했다. 어떤 이유로든 수행 중 천막을 벗어난다는 건 정진을 포기했음이다. 스스로를 가둔 청규에서 혹한의 겨울 기운보다 매서운 불퇴전(不退轉)의 결기가 느껴진다. 선객과 화두와의 사투가 벌어지는 선원이자 세상에서 가장 깊은 침묵이 흐르는 선원이다. 

땅과 하늘 사이에 서있는 상월선원에 겨울 달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천막 주위를 돌며 손상된 곳은 없는지 꼼꼼히 점검해 갔다.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 ‘큰일’이다. 살에는 칼바람이 틈을 뚫고 들어가 선객의 무릎이라도 파헤치면 좌복에서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새벽 3시. 처소로 돌아와 불감(佛龕) 앞에서 108배를 올렸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올리는 108배는 출가 후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다. 성지순례 때도 이운해 가는 불감은 조계종 총무원 앞 불구점에서 몇 만원에 샀지만 보물 1호다. 디스크로 고생할 때도 무릎 꿇은 채 머리만 숙이는 108배를 올렸다. 신기한 일이다. 천막결사 결제 직후부터 허리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오체투지에 버금가는 108배를 해보니 처음엔 25분이 소요되더니 며칠 후에는 15분 만에 끝냈다. 상월선원 총도감을 보는 내내 ‘원만회향’을 기원하는 108배만은 잊지 않았다. 절을 마치고 잠시 사념에 잠긴 후 펜을 들었다. 아침 공양을 넣을 때 도반의 도시락을 싼 보자기에 넣어 전할 쪽지다. 

혜일 스님의 보물 1호 아미타삼존불 불감.<br>
혜일 스님의 보물 1호 아미타삼존불 불감.

‘스님 수행정진하는 모습에 귀의합니다!’

천막결사를 두고 이런저런 논의를 할 때였다. 당시만 해도 자승 스님(조계종 전 총무원장)은 홀로 노숙정진하겠다고 했다. 대중이 치안 등의 이유를 들며 만류했고, 진각 스님 등 세 명의 스님이 함께 정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저는, 외호(外護)를 맡겠습니다.”

전 대중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 몸으로 어떻게?”라는 의미가 담긴 건 확실했다.

허리 디스크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한 번에 30미터 걷기도 버거웠는데 그 세월만도 1년이 넘는다. 대중논의가 있던 그때는 다소 호전돼 100미터는 걸을 수 있었다. 

“선원에서 대중과 함께 정진하고 싶지만 건강이 허락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호만은 제가 맡겠습니다.”

법당, 석축은 물론 토목, 교량, 연못불사까지 해 보았던 내공이 빛을 발했다.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크고 작은 공사를 모두 합치면 1000억원대 불사다. 이 사실만은 대중도 능히 알고 있었다. 하여 상월선원 총도감(總都監)직을 맡았더랬다. 한국불교 중흥을 염원하는 천막결사가 온전히 회향하도록 심혈을 기울여야만 하는 자리였다. 

첫날부터 사단이 났다. 하루 한 번 선원에 넣는 도시락은 사찰음식으로 구성됐는데 봉국사가 담당했다. 오전 11시, 결사 후 첫 공양을 올렸다. 아뿔싸! 수저가 없다. 참회는 나중에 할 일이고 수저부터 급하게 찾았다. 시내로 나가면 구할 수 있지만 그럴만한 촌음조차 없다. 수저를 구해 넣어도 공양시간이 지났다면 받은 도시락도 통째로 돌려보낼 선객들이다. 허겁지겁 수저 4세트를 구해 넣었다. 나온 도시락을 확인해 보니 모두 비었다. ‘어찌 드셨을까?’ 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도 샜다. 영하 10도의 칼바람 타고 들이치는 비바람은 손마디를 자르듯 예리했다. 천막선원이라 해도 4개월의 정성을 들여야 했지만 주어진 시간은 한 달이었다. 토목공사만도 열흘 넘게 소요됐다. 기본 설계도 없이 직관으로만 지은 선원. 곳곳에 도사리고 있던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 한다. 그 허점이 선객을 크게 다치게 하거나 결사를 중단시킬 ‘큰일’을 내고 만다면 그 책임은 총도감이 짊어져야 한다. 

결사돌입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공양 넣는 작은 창으로 천막 안을 찰나지간에 살폈다. 설핏 보이는 수행자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 이후, 앉으나 서나 그 오묘한 눈빛이 그려졌다.

출가 전, 양산 영축산의 한 암자에서 100일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짬이 나면 산 이곳저곳을 누비며 다녔는데 비승비속의 수행자들을 만났다. 거사들은 청년의 재목을 알아보았던지 참선법을 일러주었다. 기도와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금세 체득했다. 

“깨달음에 이르려면 출가해야 한다.”

혜일 스님의 출가인연은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강렬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밀양 진불암에서 3년 정진하고, 강진 백련사에 무문관 짓고 용맹정진한 혜일 스님이다. 

천막을 살피고 돌아와 앉은 자리에서 알 수 있었다. 천막 안 수행자 눈빛의 근원을!  그건 깨달음을 향한 간절함과 열정이 빚어낸 결정체였다. 하여, 쪽지에 글을 남겼다.

‘스님 수행정진하는 모습에 귀의합니다.’

투박한 한 문장. 도반에게 전하는 쪽지이자 아홉 선객에게 드리는 편지다.

허리 디스크를 앓는 중에도 상월선원 총도감을 자청했다.<br>
허리 디스크를 앓는 중에도 상월선원 총도감을 자청했다.

총도감 혜일 스님에게 하루하루는 살얼음판 걷는 긴장의 연속이었으니 회향 날 감흥이 남달랐을 터다.

“감사했습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진솔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혜일 스님은 잠시 숨을 고르며 상념에 젖었다.

“하루 한 끼 공양이었습니다. 최소 결제 후 한 달 동안에는 하루 중 배고픈 순간이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씻지도 않았습니다. 불쾌한 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서로를 위로하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스트레스가 최고점을 찍었을 때는 마음 또한 심하게 요동쳤을 것입니다. 그 극점을 넘어야만 대중수행이 가능한데 아홉 선객은 멋지게 뛰어 넘으셨습니다. 방선 후 서로 마주하는 눈빛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상월선원 정진을 통해 어느 경지에 올랐는지, 무엇을 가름했는지 저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비 새고 수도가 얼어버린 환경에서도 정진을 이어가셨던 아홉 스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상월선원에는 하루 1000명, 총 10만여 명이 다녀갔다. 그 많은 사람 맞이하는 것도 총도감의 몫이다. 

“다행스러웠던 건 대중을 이끈 대부분이 저하고 차 한 잔이라도 했거나 전화로 안부라도 물었던 지인이었습니다. 천막법당이라도 나름의 의전이 중요한데, 큰 결례는 범하지 않았던 듯싶습니다. 자원봉사에 동참한 불자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상월선원에는 상주 자원봉사자 50여명, 선원 주변 치안을 담당하는 호법대중 300여명이 포진해 있었다고 한다.

“처음 보시는 불자님이 저에게 묻더군요. ‘스님, 제가 해우소 청소해도 될까요?’ 가슴 뭉클했습니다. 한 봉사자가 남편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저에게 오셨습니다. 제가 ‘며느님이 여기서 봉사하고 계셔서 집안 일이 좀 소홀할 터인데 죄송합니다’ 하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는데, 시어머님의 답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며느리가 큰 복을 짓고 있습니다. 소중한 기회를 주셨으니 저희가 감사합니다.’ 찻집 보살님은 한 분이라도 더 차를 내주려 애쓰셨습니다. 보통 밤 10시까지 찻집을 열었는데 철야정진 때는 12시까지 하시더군요. 자원봉사 해주신 분들 모두 초청해 꽃나무 아래서 차회라도 열며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하는데 코로나19 여파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혜거 스님이 쓴 ‘상월선원 방함록’에 담긴 선시가 인상 깊다고 했다. 

‘남한산성 아래 휘영청 밝은 서리달빛/ 삭풍한설에 솔잎마저 꽁꽁얼어 검푸르다./ 달마스님 법맥이 우리나라 전해온 오늘,/ 밝고 밝은 선객 눈빛 차가운 천막 아래 빛나네.’   

상월선원의 문을 채웠던 자물통.<br>
상월선원의 문을 채웠던 자물통.

결제 때 상월선원 문을 닫고 자물통을 채운 사람은 혜일 스님이다. 해제 때 상월선원 자물통을 열고 문을 연 사람 또한 혜일 스님이다. 선원에서 나온 아홉 선객을 500여 사부대중이 맞이할 때 도량은 환희로 충만했다. 그때, 혜일 스님은 자물통과 열쇠를 조용히 움켜쥐었다. 수행자 삶의 원동력을 불어넣어 줄 보물 하나를 하나 더 획득한 것이다. 

출가 후 매일한다는 108배의 효험이 궁금했다. 혜일 스님은 봉국사 초하루 때마다 여는 ‘참회법회’를 전했다. 봉국사에는 자신이 잘못한 일을 적어 넣는 유리로 된 통이 있다. 법회가 끝나면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참회문을 소각한다.

봉국사는 매월 초하루 때 ‘참회법회’를 봉행한다.<br>
봉국사는 매월 초하루 때 ‘참회법회’를 봉행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쉬이 시인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합리화에 급급합니다. 자자포살이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대중 앞에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사안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밀이 보장된다면 자신의 모든 잘못을 문자를 통해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지난 한 달을 되돌아보며 봉국사 주지로서, 출가자로서 잘못한 일을 소상히 적어 참회문 통에 넣습니다.”

하루를 마치며 올리는 108배를 통해서도 참회하고 있음이다. 작지만 큰 변화가 있을 법하다.

“저는 고집이 세고 아상이 강합니다. 참회법회를 매월 봉행하다보니 더디게라도 조금씩 제 자신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말 한마디라도 이전보다 부드럽게 하려 노력합니다.”

이생에 꼭 해내고 싶은 불사가 있는 지 궁금했다. 혜일 스님은 탄자니아 농업학교 이사로서의 포부를 내보였다.

“농업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탄자니아 상위 10%에 포함되는 수재들입니다. 교과과정을 통해 한국어 교육에 만전을 기하려 합니다. 출가 원력을 품은 인재가 한두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 인재를 한국 승가에서 재교육시킨 후 아프리카로 보내는 겁니다. 그 스님이 다른 나라에서 또 하나의 학교와 법당을 짓고 교육불사를 이끄는 겁니다. 그 학교에서 또 한두 명의 학생이 출가할 것입니다. 아프리카 54개국에 학교 하나, 법당 하나를 지어 보고자 합니다.”

아프리카 전역에 불교를 전하려는 대작불사다. 

불감 앞에서 매일 108배를 올리는 신심과 역사적인 상월선원 외호를 거뜬히 해 낸 혜일 스님이라면 그 불사가 ‘꿈’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투명한 달빛이 아프리카의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54개의 법당에 떨어지기를 기대한다. 그곳 어딘가에 ‘무문관’이 들어설 수도 있다. 그날, 저 자물통이 빛을 발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혜일 스님은
1986년 수계. 은사는 도견 스님. 총무원 기획실장·문화부장, 아름다운동행 사무총장, 백련사·연화사 주지. 조계종 14·15·17대 중앙종회의원. 현재 성남 봉국사 주지.

 

[1532호 / 2020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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