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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13칙 소산시비(韶山是非)

구름 없는 경지란 시비 탈속 모습

지극히 맑은 하늘 흰 구름 한 점
푸른 하늘 더 푸른 것 실감케 해
한 점 흰구름처럼 불법의 모습은
일체선악·시비 초월 한 절대세계

승이 소산에게 물었다. “시비가 붙지 못하는 곳에도 그 어떤 언구가 있는 겁니까.” 소산이 말했다. “그럼, 물론 있고말고.” 승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게 어떤 언구입니까.” 소산이 답했다. “구름 한 점 없는 경지라네.”

소산환보(韶山寰普)의 법맥은 약산유엄-선자덕성-협산선회–소산환보이다. 위의 문답은 시비분별을 초월해 있는 깨침과 그 깨침의 현성이 어떤 모습인가를 파악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 분별을 떠나서 파악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우리네 깜냥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교와 추론의 분별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승은 그런 것에 걸리지 않는 한마디를 소산에게서 찾고 있다. 이에 소산은 비유와 상징으로 대치하고 있다. 맑은 하늘이란 소산 자신의 심정이고 언구조차 용납하지 않는 본래심의 모습이다. 맑은 하늘은 더 이상 맑다 흐리다 하지 않는다. 낮에는 햇살이 드러나 비추고 밤에는 달빛을 토해내는 자연의 모습이다. 그러나 맨 하늘만 가지고는 너무나 맹맹하다. 때문에 지극히 맑은 하늘에는 차라리 흰 구름 한 점이 떠다니고 있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푸른 하늘은 더욱더 푸르다는 실감이 난다. 그것을 ‘구름 한 점 없는 경지라네’ 라고 말했다. 구름 한 점 없다는 것이야말로 구름이 한 점 흘러가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곧 창공을 흘러가는 한 점의 흰 구름처럼 불법의 단적인 모습은 일체의 선악 및 시비를 초월한 절대세계라는 것이다.

어떤 승이 물었다. “소산의 경지는 어떤 겁니까.” 소산이 말했다. “고금에 원숭이와 새가 우짖고, 푸른 빛 옅은 연기가 일어나는 계곡이로다.” “그와 같은 경지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한 걸음 물러나서 다시 살펴 보거라.” 소산은 승에게 지금 자신이 사로잡혀 있는 경지를 벗어나서 아무런 구속이 없이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경지에서는 항상 그렇듯이 원숭이와 새가 우짖고, 계곡에서는 푸른 빛 옅은 연기가 일어나는 모습일 뿐이다.

일찍이 덕산원명은 “궁극적인 곳에 이르면 삼세제불의 입도 벽에 걸어두어야 한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은 껄껄 웃는다. 만약 그 한 사람을 안다면 참학을 마친 것이다”고 말했다. 궁극적인 곳이라는 것은 언전(言詮)이 다하여 이론과 설명이 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곧 절대고요로서 우레와 같은 침묵이고, 달마의 면벽(面壁)이며, 유마의 일묵(一黙)으로 통한다. 삼세의 제불이 뱉어내는 팔만대장경의 설법, 삼라만상의 자연물상이 들려주는 광장설의 무정설법도 끊임없이 솟구치며, 포효하는 해조음도 모두 맥을 추지 못한다. 바로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서 한바탕 껄껄껄 웃어넘기는 사람이어야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선자가 된다. 그와 같은 사람이라면 일생을 걸고 정진하는 참학인의 본분사를 당장에 그만두고 걸망 하나 매고서 룰루루 랄라라 노래를 부른다.

참으로 쾌할한 사람이다. 그러나 맹물 맛에서 최고의 맛을 감미해 내듯이 아무런 작위(作爲)도 없는 일상에서 바로 나뭇잎을 모두 떨구어버린 가을날의 나목처럼 진실한 자신을 대한다. 이런 경지를 당장 그 자리에서 생사일대사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로 좌단양생피(坐斷孃生皮)라 하였다. 그 한 사람의 한바탕 웃음이란 탐욕과 불만과 어리석음과 아만과 의심을 탈락해버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자신이 바로 노당당(路堂堂)하고 적쇄쇄(赤灑灑)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그 찰나에 일생을 두고 고심참담하게 참학하는 일일랑 모두 벗어버린다. 새가 새장을 벗어나 허공을 허허롭게 날아다니듯이, 물고기가 어망을 뚫고 대양의 물결을 가르며 유유히 헤엄치듯이, 허공에는 새의 자취하나 남기지 않고 물속에는 물고기의 흔적하나 남김이 없다. 본제(本際)를 해탈하는 선자의 경지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소산이 말한 구름 한 점 없는 경지란 시비를 탈속한 모습이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32호 / 2020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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