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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14칙 양산조의(梁山祖意)

불법의 궁극은 언설로 표현 못 해

선과 교 나눔은 차이 논함 아냐
부처 속성·방편 이해위한 제스처
상호의지 보완·화회 관계 피력

승이 양산에게 물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양산이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양산은 북송대 조동종의 양산연관(梁山緣觀)이다. 그 법계는 동산양개 - 운거도응 - 동안도비 - 동안관지 - 양산연관으로 조동종의 제5세이다. 호남성 낭주(朗州) 양산(梁山)의 관음사에 주석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불법의 궁극은 언설로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분별심으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는 심행처멸(心行處滅)이므로 어떤 언어나 사유로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여러 가지 수단과 방편을 구사한다고 해도 스스로 참구하여 체득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런데도 예전의 본색작가(本色作家)들이 내뱉어 놓은 말귀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분별하고 미주알고주알 갖다 붙이려는 것은 쓸데없는 분별망상일 뿐이다.

조의(祖意)와 교의(敎意)는 본래부터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표출된 형식에 따른 분류이다. 때문에 일찍부터 선은 부처님의 마음[禪是佛心]이고 교학은 부처님의 말씀[敎是佛語]이며 율은 부처님의 행위[律是佛行]라고 말해왔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선교일치 내지는 선교융합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선과 교를 나누는 것은 그 차이를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부처의 속성과 방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제스처였고, 상호 의지적인 보완과 화회의 관계임을 피력하기 위한 모색이었다.

본 문답에서 제시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는 남악회양과 동학이었던 탄연(坦然)에게서 처음 보이는 언구인데, 후대에 화두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기관(機關)이다. 기관이란 제자를 이끌어가는 선지식의 수단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조사서래의라는 말속에는 어떤 문제든지 일시에 해결해주는 어떤 도깨비 방망이라도 들어있는 것인 것처럼 화두에 맹목적으로 전념하는 간화사선(看話邪禪)에 떨어지는 경우도 물론 허다했다. 이런 까닭에 양산은 언설의 분별과 맹목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제자의 물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상대해주고 있다. 단순히 어떤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조사가 왜 서쪽에서 왔느냐고 묻는 교학적인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승의 질문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답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과시일 뿐이다. 그래서 양산이 어떤 답변을 한다고 해도 제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양산은 그와 같은 제자에게 답변보다는 먼저 답변을 기대하는 마음부터 치유해주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산은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제자의 마음을 끝까지 압박하여 스스로 항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효과만점이라는 것을 믿었다. 양산은 참으로 보이지 않는 친절을 베풀어주고 있다. 그것은 당장에 그 자리에서 제자의 입막음을 유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서로 차별을 두어 그것을 고착화시키고 집착하여 개별적인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그 자신이 만들어낸 도그마에 걸려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양산이 사운대는 제자의 질문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답변한 방식은 간명직절(簡明直截)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말하기 이전에 깨치고 말을 듣고 궁극적으로 돌아갈 바를 제자 스스로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제자가 입을 벌리고 혓바닥을 놀리는 것은 굳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양산은 어떤 것이 옳은지 아직 감도 잡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함구하고 있든지 아니면 일찌감치 물러나 있는 것이 그래도 본전은 찾을 것이라고 응수해 준 것이다. 과연 제자는 자신의 질문에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가. 그 여부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양산의 말에 순순히 따라주었을지, 아니면 반대로 고함이라도 질렀던가 하는 대꾸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33호 / 2020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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