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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단원이 그렸다는 용주사 대웅전의 삼불회도-하

기자명 주수완

김홍도 작품 시비 보단 제작 연대 먼저 알아야

본존불 하단 축원문 분석해보면 1800년 이후 조성 입증되지만
적외선 촬영 결과 새로 덮어 쓴 것 확인되면서 논란만 이어져
19세기 후반 불화와 화풍 유사하지 않아…미술사 양식 살펴야

용주사 삼불회도. 평소에는 불상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축원문이 중앙 불단에 보인다.

용주사 삼불회도를 둘러싼 논쟁은 작가가 누구인가의 문제와 이 그림이 언제 그려졌느냐의 문제가 서로 맞물려 있다. 김홍도 작품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는 이 불화가 용주사 창건 때의 작품이 아니라 19세기말 이후 작품이라는 해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1790년 용주사가 세워질 당시의 불화라는 견해는 양립될 수 없을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는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1790년에 놓고 보면 너무나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이고, 또한 함께 작업한 화승들의 작풍에서는 이러한 스타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이 불화를 19세기 말로 놓고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즉 전통불화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반적인 화풍이므로 굳이 김홍도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반대의 해석도 마찬가지 논리에서 접근할 수 있다. 만약 이 작품이 1790년에 그려진 작품이라면, 결코 일반적인 화승의 그림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화 화승이 아닌 일반회화 작가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당시 이런 서양화법 같은 첨단화풍을 구사할 정도의 화가는 왕실 화원에 속한 화가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홍도의 작품인가 아닌가의 논쟁에 있어 먼저 풀어야할 것은 이 작품의 정확한 제작연대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삼불회도의 중앙 삼세불 중 가운데 본존불의 하단 불단에 씌인 축원문에 대한 분석이 쟁점이 되었다. ‘주상전하수만세, 자궁저하수만세, 왕비전하수만세, 세자저하수만세’라는 축원문의 마지막 ‘세자저하수만세’에 있어 세자는 후에 순조가 되는 정조의 두 번째 아들을 지칭하는 것일텐데, 순조는 1790년 6월에 태어났지만 세자로 책봉되는 것은 1800년이었기 때문에 이 불화에서 ‘세자’를 언급했다는 것은 최소한 용주사 창건기가 아닌, 1800년 이후에 조성된 불화임을 입증한다는 지적이다.

용주사 삼불회도 현재의 축원문(좌) 및 적외선 사진에 의한 지워진 축원문(우).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주목된다. 첫째로는 비록 당시 정조의 막 태어난 아들은 아직 세자로 책봉되기 전이었지만, 조선시대의 불화 축문에는 의례적으로 항상 ‘세자저하수만세’라는 문구가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아들이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인데도 의례적으로 ‘세자저하수만세’라고 적은 경우도 많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두번째로는 이 불화가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불화의 축원문은 일반적으로 ‘주상전하○○년이씨 성수만세…’와 같이 왕의 태어난 간지명을 쓰고 ‘이씨(李氏)’라고 성씨까지 적는 방식이지만, 이 불화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용주사 삼불회도의 적외선 사진 촬영 결과, 이 축원문은 원래 있던 축원문을 지우고, 새로 덮어 쓴 것이 확인되었다. 원래의 축원문은 ‘자궁저하수만세’ 축문이 빠진 일반적인 주상, 왕비, 세자의 삼전하를 위한 축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자궁저하’ 즉 의심의 여지없이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칭하는 축원문이 추가된 것이다. 그것도 왕비 앞에 혜경궁 홍씨를 넣었다는 것은 정조의 지시가 없었다면 즉, 용주사 창건 당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축원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용주사 불화가 1790년 창건 당시, 그것도 정조의 지시로 축원문을 고쳤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그럼에도 함께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 및 용주사 창건기에 제작된 용주사 범종에는 분명히 ‘세자저하’라고 하지 않고 ‘원자저하’라고 사실에 맞게 적시하고 있기 때문에 삼불회도에도 ‘원자저하’로 되어 있었어야 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은 정조의 현륭원 건설과 용주사 중창 및 공사과정 전반을 간략하나마 정리한 글로서 불상이나 불화의 작가가 직접 작성한 글이 아닌 반면, 불화에 쓰인 글은 작가가 직접 쓴 글이므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즉, 작가는 의례적인 방식으로 적을 뿐이고, 원문을 쓴 사람은 전후 사정을 따져서 글을 작성했을 것이다. 범종의 명문 역시 주종장이 직접 쓴 글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정조의 지시로 삼불회도의 축원문을 고쳐 쓸 때만이라도 ‘원자저하’로 바로잡아야 하지 않았을까? 정조는 의성빈씨가 1782년에 낳은 그의 첫째 아들을 불과 세 살일 때 세자로 삼았을 정도로 급했다. 삼불회도 축원문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누락된 것은 바로잡으라고 지시했겠지만, ‘세자’의 문구는, 그것도 불교의 힘을 빌어 낳았다는 둘째 아들에 관해서만큼은 이미 굳건히 세자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부처님 아래에 그대로 세자로 적어두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일반적인 불화에 비해 인간적인 초상화처럼 그려진 용주사 삼불회도의 부처님(아미타불) 세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꼬일대로 꼬여버린 이 문제들은 보통의 불화들처럼 화기를 적었더라면 조금 더 쉽게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의 시작인 셈이다. 왜 굳이 화기를 적지 않았을까? 혹 정조는 김홍도 등에게 은밀히 지시해서 삼불회도의 부처님 한 분의 얼굴을 사도세자의 얼굴로 그리도록 함으로써 일종의 어진을 대신할 용도로 삼았기 때문일까? 보통 삼세불, 삼신불의 부처님 얼굴은 거의 똑같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 불화 속 세 분 부처님 얼굴은 다르다. 특히 아미타불의 얼굴이 그렇다. 이러한 작업이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사 종료 후 원문을 작성한 사람조차도 김홍도 등이 관여한 사실은 몰랐던 것이 아닐까? 또한 어진 개념의 불화임을 알기에 불화의 작가들은 불화 위에 다른 기록을 못했던 것은 아닐까.

참고로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린 뒤에 그 상으로 안기찰방에 제수되어 근무했었는데, 용주사 불화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1790년의 이듬해인 1791년에는 연풍현감으로 부임했다. 이번에는 무엇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19세기 후반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비교 대상으로 삼는 19세기 후반의 불화들은 안면에 음영법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화풍이 그다지 유사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19세기 후반에 음영법이 유행한 것도 이 용주사 삼불회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제가 꼬일수록 초심, 아니 작품으로 돌아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술사는 양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33호 / 2020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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