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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과학혁명

깨달음과 과학혁명은 가장 근본적인 변화 요구

17세기 이후 실험·관찰로 이론 검증하는 새로운 차원 진화
아인슈타인, 불교를 과학시대 살아남을 유일한 종교로 예측
우리 상식과 혁명적으로 다른 세계관 받아들이는 게 깨달음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명왕성이 행성으로서의 지위를 잃은 후 태양계의 가장 바깥 궤도를 도는 행성은 해왕성이 되었다. 그런데 해왕성이 발견된 과정이 대단히 흥미롭다. 우리는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측하며 새 행성을 발견했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해왕성을 발견한 것은 망원경이 아니라 수학이다. 천문학자들은 천왕성의 궤도가 예상에 어긋나고 불규칙하게 관측된다는 점에 의아해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수리천문학자 르베리에는 이런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행성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예상하고 뉴턴의 역학으로 특정 질량과 궤도를 가진 또 하나의 행성이 천왕성보다 더 먼 곳의 특정 좌표에 언제 어떻게 존재할 것이라고 계산해 냈다. 이 행성이 미치는 중력 때문에 천황성의 궤도가 영향을 받아 불규칙하게 관측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 계산 결과를 전달받은 독일의 천문학자들은 불과 30분 만에 해왕성을 발견해 내었다. 인간 이성의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였다.

이런 승리를 이루기까지 인류 지성사는 여러 번의 혁명적 변화를 거쳐야 했다. 역사상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연세계 및 우주를 자신들과 여러 모로 닮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신 또는 영적 존재들이 지배하고 운용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지금보다 사고가 단순했던 시절 자연을 설명하려 노력했던 우리 조상들의 소박한 시도였다. 그 이후 이런 신화적·종교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대신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로 자연과 인간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지적 시도가 등장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음양오행설과 사주명리학 등도 이 단계의 사고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형이상학적 사고가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너무 두루뭉술한 원리들로 되어있어서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쉽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또 반론이 나와도 쉽게 해석을 바꾸어 빠져나갈 수 있어서, 원칙적으로 반증이 불가능하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운명철학과 19세기 헤겔의 형이상학 등은 모두 이런 부류에 속한다. 21세기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 눈에는 솔직히 좀 엉터리 이론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뉴턴이 완성한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인류가 성취한 과학적 사고방식은 수학이라는 엄밀한 도구를 사용하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이론의 내용을 정교하게 검증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한다. 

여러 차례의 혁명적 변화를 거쳐 완성된 우리 시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아무 희생 없이 저절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이태리의 과학자 갈릴레이는 그의 이론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감금당하고 화형 직전에까지 갔었다. 데카르트는 신적인 요소를 배제하며 그의 철학을 전개하려다가 교회로부터 위협을 느껴 조국을 등지고 네덜란드로 피신해 20여 년을 살았고, 결국 프랑스로 귀국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서구가 역사의 주도권을 쥐게 만든 근대의 과학혁명이 교회의 영향력이 가장 약했던 영국의 뉴턴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닌데, 그러기까지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의 희생이 있었다.

철학 안에서도 희생을 치른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 20세기 중반 독일의 나치와 공산주의 독재체제 소련의 위협에 직면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는 자연과학자 출신의 철학자들이 모여 나치즘과 공산주의 모두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는 점을 보이는 논리실증주의를 발전시켜 저항했다. 이들은 나치즘과 공산주의는 모두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진리의 체계가 될 수 없는 선전선동이고 기만술책이라고 주장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이 과학자 출신 철학자들은 주로 영어권 나라, 특히 미국으로 탈출해서 그곳에서 현대 분석철학의 근간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렇게 과학적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진화한 분석철학이 현재 세계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치적 혁명이 사회체제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듯이, 과학혁명에 의해 탄생한 이론은 그 이전의 이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천동설이 지동설로 대체된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하늘이 도는 줄 알았는데 살고 있는 땅이 공중에 붕 떠 맹렬한 속도로 돌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을 16세기 서구인들을 상상해 보라. 그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17세기 뉴턴에 의해 완성된 고전역학은 지구상 뿐 아니라 당시까지 알려진 우주 모든 물체의 움직임을 수학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정교히 설명하고 예측했다. 뉴턴 이전까지 신성한(divine) 영역의 물체로 여겨졌던 천체가 지구상의 물체와 다르지 않은 물질로 되어 있고 또 동일한 물리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뉴턴 이후에도 과학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또다시 혁명적 변화를 거듭해 왔다.

과학의 성격과 그 혁명적 발전 과정을 고려해 보면, 과학의 시대가 도래해도 살아남을 종교로는 불교가 유일할 것이라고 본 아인슈타인의 견해가 여러 모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나는 불교의 깨달음과 과학에서의 혁명이 닮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깨달음도 과학혁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나는 삶과 세계를 철저히 무아와 연기 및 공(空)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느끼고 또 행위하는 것이 (철학적)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모든 사물이 여러 조건과 이러저러한 관계로 맺어져 존재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롯해 아무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가 될 수 없어서 자성(自性)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만물은 자성이 없어 실재(實在)하지 않아 단지 환(幻)일 뿐이라는 점을 십분 받아들여 내면화하는 것이 (철학적) 깨달음이다. 이 모두가 우리 일상의 믿음과는 정반대여서 이렇게 우리 상식과는 혁명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받아들여야 가능한 것이 불교의 깨달음이다. 

나는 철학적 깨달음과 대비되는 열반적 깨달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34호 / 2020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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